[탁류세평] 고려대학에서 식량주권을 생각하다
식량주권은 먹거리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기 결정권을 의미한다. 원래는 1990년대 라 비아 캄페지나(la via Campesina)라는 농민단체가 자유무역에 반대하여 소농들의 농업 생산 자주권 확보를 위한 개념이었다. 이후 식량주권은 서구 농민들과 도시 소비자들을 포괄하고, 초국적 농식품 기업들의 식품 체계 지배에 대한 비판과 저항운동으로 발전했다.
먹거리는 모든 인간의 생명과 생존,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 제공되어야 할 공공재이다. 자본주의의 등장과 시장주의의 심화에 의해 먹거리 역시 극도로 상품화되었다. 시장 논리에 의해 돈이 많은 사람은 비싸고 몸에 좋은 음식을 고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값싼 식품으로 한 끼를 때운다. 시장 논리에 따라 먹거리 불평등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먹거리는 상품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첫째, 모든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음식은 생명 및 건강과 깊이 관련된다는 점에서 다른 상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음식물은 우리 몸을 구성하며 발육에 기여하고, 나쁜 음식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둘째, 우리가 활용하는 식재료들은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쌀과 채소는 자연과 농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 치킨과 제육볶음은 닭과 돼지라는 생명체의 일부를 식재료로 활용해서 만든 음식이다. 닭이나 돼지는 오늘날 대부분 공장형 축산을 통해 생산되지만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생산될 수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상품은 아니다. 칼 폴라니(Polanyi)의 표현을 빌자면, 먹거리는 허구적 상품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장 자유주의는 상품이 아닌 자연·토지·인간을 상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 파멸적 결과는 폴라니가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명징하게 보여준 바 있다.
시장 기제가 아닌 방식으로 음식을 조달받을 수 있을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대안들이 이미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생활협동조합이다. 가까이 위치한 경희대를 비롯해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도 생활협동조합이 조직되어 있고, 교내에 직영하는 식당과 카페가 존재한다. 반면 고려대학교의 먹기 공간은 시장주의의 첨단에 있다. 대형 프랜차이즈와 민간 업자들이 입주하여 교내의 모든 식당과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은 일반 사기업과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리 세상이 시장주의를 신봉한다고 해도 대학은 공공성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음식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어야 할 공공재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초·중·고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이 제공되고 있다. 오랜 논쟁과 정치적 갈등이 있었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는 것이 정부와 지자체의 공적 책임이라는 데 합의한 결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먹거리에 대한 공적 접근이 갑자기 사라진다. 신입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먹거리 사막(food desert)에 버려진다. 먹거리 사막은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신선한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지역을 의미한다. 사회·경제적 환경 때문에 건강하고 몸에 좋은 음식 대신 패스트푸드나 편의점 음식 등을 먹게 되는 상황을 사막에 빗댄 표현이다. 편의점에 앉아 삼각김밥과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는 학생들을 보면서 먹거리 사막을 떠올리는 사람은 나뿐일까.
대학생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먹거리 안전망 역할을 해주던 부모님 품을 떠나 기숙사나 원룸으로 이주하면서 먹기의 대변화가 일어난다. 바쁜 학교생활 때문에 집밥과는 거리가 있는 식사를 하게 된다. 20대 대학생의 식단은 매우 취약하다. 맛을 좇아 극단적으로 달거나 기름진 것을 먹기도 하고, 다이어트를 위해 특정 식품만을 섭취하기도 한다. 시간에 쫓겨 조리가 어렵다 보니 배달이 주 음식 조달 방식이다. 식비를 줄이기 위해 저렴한 가공식품을 선택하거나 편의점을 이용하기도 한다.
음식은 운동이나 유전과 더불어 개인 건강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젊었을 때 식습관은 평생 크게 변하지 않는다. 또한 청년들이 가정을 꾸려 부모가 되었을 때 자녀들의 입맛과 취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학생들이 잘 먹는 것은 그들의 삶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교내 구성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식량주권을 보장받길 기대한다. 그 출발점이 생활협동조합이다. 학생·직원·교수들이 공동으로 출자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는 생활협동조합이 출범하고, 그 주요 사업으로 생협 직영 식당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김철규 문과대 교수·사회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