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세평] 나만의 융합 비빔밥 만들기
오늘날의 에너지, 환경, 도시, 기후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일한 해법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 기술적 해결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사회적 이해와 문화적 맥락, 정책적 판단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서로 다른 영역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진정한 전환의 실마리가 생기는 융합 학문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융합 학문 또는 연구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나는 ‘비빔밥’을 떠올린다.
비빔밥은 각기 다른 색과 향, 질감을 가진 재료들이 한 그릇 안에서 어우러지는 음식이다. 고사리의 씁쓸함, 달걀의 부드러움, 고추장의 매콤함이 만나 하나의 새로운 맛을 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완전히 섞는 것’이 아니라, 각 재료의 고유한 특성을 유지한 채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융합 연구도 마찬가지다. 도시, 에너지, 환경, 사회, 기술, 정책 같은 다양한 분야가 만나 각자의 관점과 방법론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낼 때 창의성이 발현된다.
학제 간 협업의 현장은 언제나 이상적이지만은 않다. 미국에서 참여했던 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융합 연구단에서 공학자와 생태학자가 서로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해 한참 논쟁을 벌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비빔밥을 너무 세게 비비면 맛이 사라진다’라는 생각을 했다. 협업에서도 각자의 간격을 존중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 논쟁 끝에서 서로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이해하자,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가 도출되었고, 그것이 프로젝트의 전환점이 되었다. 서로 다른 시각의 충돌이 오히려 융합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배운 순간이었다.
융합 연구의 본질은 ‘섞이되,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각 분야의 전문성이 단순히 녹아드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호보완을 하는 과정에서 ‘집단적 창의’가 일어난다. 좋은 융합 연구는 한 사람의 성취보다 집단적 사고의 확장을 통해 문제 해결의 새로운 길을 여는 데 의미가 있다. 이 과정 속에서 연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게 되고, 학문적 시야는 한층 넓어진다.
‘나만의 융합 비빔밥’을 만든다는 것은 곧 융합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여정이다. 내 안에는 공학 기술, 정책, 도시 시스템, 인프라, 탄소 중립, 시민참여 등 다양한 경험과 관심이 공존한다. 이 재료들이 때로는 부딪히고 섞이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 과정 자체가 학문적 성장의 일부라고 믿는다. 융합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시도하고 조율하는 과정이며, 실패와 재해석이 반복될수록 맛이 깊어진다.
문화적으로 비빔밥은 한국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상징한다. 전통과 혁신, 개인과 공동체가 공존하며, 서로 다른 요소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학문 간 융합 역시 이와 같다. 지식의 깊이만큼 관계의 폭이 중요하며, 다른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신뢰와 이해가 쌓일 때 지속 가능한 변화가 가능해진다. 비빔밥의 한 그릇에 담긴 조화의 정신처럼, 학문과 사회, 기술과 문화가 서로를 존중하며 어우러질 때 진정한 혁신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혁신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연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만의 융합 비빔밥’을 만들어가는 일상적인 노력 속에서 싹튼다.
김여원 공과대 교수·융합에너지공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