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혈단신 피난민 소년, 한국 경제 사령탑 되다
이용만(행정학과 55학번) 전 재무부 장관
우체국 서무과에서 재무부까지
열정과 따뜻함으로 얻은 신임
“공직은 나를 나아가게 한 힘”
“어려운 순간마다 길이 있었습니다.” 이용만(행정학과 55학번) 전 재무부 장관은 자신의 우여곡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6.25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남한에 내려온 그는 어려운 형편에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재무부 장관이 됐다. “제 이야기가 앞으로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만날 후배들에게 도전할 용기를 주면 좋겠어요.”
가난 속에도 놓지 않은 책
1933년 북한 강원도 평강군에서 태어난 이 전 장관은 고된 일상에도 학업을 이어가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나라에서 집마다 농지 면적 비율에 따라 가마니를 만들어 내놓으라고 했어요. 자정쯤 가마니를 다 짜면 그제야 꾸벅꾸벅 졸며 시험을 준비했죠.” 부모님께 효도하려 학업에 열중했지만 18살에 맞은 6.25 전쟁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 “공비를 수색하러 간 사이 고향 마을이 폭격당해 어머니와 형이 돌아가셨어요. 저를 버리고 피난할 순 없다고 기다리다가 참변을 당하셨죠. 아버지께서 홀로 시신을 수습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뒤늦게 돌아갔을 땐 아버지의 생사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어요.”
홀로 남한에 내려온 그는 대구 육군훈련소를 찾아 자원입대했다. 수색대대 소속으로 육박전에 뛰어든 이 전 장관은 어깨와 척추에 총상을 입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총에 맞았는데 몸을 도끼로 후려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를 본 소대장이 한달음에 와 바위 뒤로 숨겨줬고 미군은 저를 들것으로 후방까지 옮겨줬죠. 저를 후송하느라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들의 애타는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휴전 후 이 전 장관은 대전에 있던 친척의 도움으로 직업을 얻고 주경야독했다. “육촌 형의 소개로 대전우체국 서무과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대학도 못 가면 나중에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을 것 같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입시를 준비했죠.”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성균관대 화학과에 합격했지만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명예제대 군인이라 등록금이 면제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50%만 감면받을 수 있었어요.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등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밤새 울었죠.”
서경대의 전신인 한국대에도 합격했지만 등록하지 못했다. 이 전 장관은 거듭된 절망에도 배움의 꿈을 놓지 않고 학자금을 모았다. 결국 1954년 성균관대 법과대에 입학했고 1년 후 고려대 행정학과에 편입했다. “어릴 때 인민군이 남조선의 고려대라는 곳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고려대를 알고 난 후 꼭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나중에 아버지께 ‘승만(이 전 장관의 어린 시절 이름)이가 서울에 가서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죠.” 그는 국제우체국 김포공항 사무소에서 생활비를 벌며 열심히 공부했다. “낮에 일하느라 듣지 못한 학교 강의는 밤에 친구 노트를 옮겨 적는 것으로 대신했어요. 직원의 숙직을 대신 해주고 낮에 학교를 다니기도 했죠.”
잊을 수 없는 첫 출근
이 전 장관은 1962년 공직에 입문했다. “당시 내각기획통제관 비서의 소개로 내각기획통제관실에 지원했어요. 우체국 근무와 6.25 전쟁 중의 자원입대가 긍정 평가됐죠. 통제관도 이북 출신이라 좋게 봐준 것 같기도 해요.” 그는 중앙청으로 처음 출근하던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첫 출근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제가 서울에 와서 중앙정부의 공무원으로 첫 출근을 합니다’라고 말했어요. 출근하는 것을 보셨다면 부모님이 매우 좋아하셨을 거예요.” 몇 개월 지난 1962년 11월, 그는 고등전형시험에 합격해 행정사무관 4호봉으로 임명됐다.
이 전 장관은 열정으로 공직에 임했다. “기획통제관실에서 근무할 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시로 점검해야 해 출장이 잦았어요. 출장비가 늘 부족했지만 집에서 만 원을 더 챙겨 동료들보다 훨씬 많은 곳을 둘러보고 보고서에 자세히 적었죠.” 남들보다 한발 앞선 덕에 상사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보고서가 아주 생생하다고 자주 칭찬을 받았어요. 그 덕에 내각 수반 표창도 받고 서기관으로 승진하는 발판을 마련했죠.”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며 만난 서봉균 정무비서관과의 인연으로 재무 관료의 길을 걷게 됐다. 1967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그의 제안에 재무부로 소속을 옮긴 것이다. “갑자기 소속을 옮기니 생소한 업무가 많았어요.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9시까지 일했죠.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밤새워 일하며 업무를 익혔어요. 여러 저축기관을 신설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내자를 확보해 보람을 느꼈죠.”
이 전 장관은 부지런하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국회의원의 지역구 민원 사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을 보내야 했어요. 해결할 수 없는 이유를 상세히 적고 편지를 동봉해 정중히 전하니 의원들이 해결된 것 이상으로 고맙다고들 하더라고요.”
공직 밖에서 배운 금융
이재국장, 기획관리실장, 재정차관보를 맡으며 요직에 오른 그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신군부가 들어서며 숙청 대상에 올라 해직된 것이다.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을 맡던 중 청와대로부터 사표를 내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대통령의 처삼촌이 공기업 사장으로 임명돼 취임 인사차 찾아왔을 때 기다리게 한 것이 문제였죠.” 20여 년 공직 생활은 한 순간에 끝났고 충격은 컸다. “억울해서 화를 참을 수 없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죠.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대통령 처삼촌 면회 거절죄’로 그간 쌓아온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됐으니까요.”
이 전 장관은 좌절의 늪에서 벗어나고자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해직을 교만에 대한 채찍이라 여기고 다시 열심히 살기로 했어요. 화를 다스리기 위해 매일 한남동에서 남산체육관까지 뛰었고 아침에는 미 8군에서 근무하는 장교를 집으로 초청해 1시간씩 토론하며 영어를 공부했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그는 실직 2년 만에 사기업 CEO를 맡게 됐다. “삼성석유화학 사장직을 사양하고 종업원이 100명 남짓이던 중앙투자금융의 사장을 맡았어요. 이재국장으로 일하던 때 제정한 단기금융업법에 따라 만들어진 회사거든요. 다들 만류했지만 제가 만든 법률에 따라 설립된 회사에 다녀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죠.”
중앙투자금융 사장에 이어 신한은행장, 외환은행장, 은행감독원장을 맡은 그는 매사에 솔선수범하고자 노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행장이 직원과 함께 거리로 나가 캠페인을 벌이는 일은 보기 어려웠어요. 그러나 당당하게 종로 거리로 나가 ‘저는 신한은행장 이용만입니다. 앞으로 저를 이용만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신생 은행을 알렸죠.” 사회가 정한 무언의 틀을 깨는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다. “가두 캠페인을 벌이자 텔레비전에서 실황을 보도하더라고요. 다른 은행원들은 ‘어떻게 은행원이 품위 없이 거리에서 영업을 하냐’고 했고요. 하지만 영업에 도움이 된다면 틀을 깨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실직 후 11년의 현장 경험이 배움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중앙투자금융에서는 사채시장을, 신한은행에서는 시중은행을, 외환은행에서는 국책은행을 이해할 수 있었죠. 은행감독원에서는 금융 감독 업무 전반을 꿰뚫어 볼 수 있었으니 해직이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결단설득으로 주식시장 되살려
이 전 장관은 1991년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은행감독원장으로 일하던 중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재무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은행감독원장을 맡은 지 1년 2개월밖에 되지 않아 뜻밖이었죠.” 장관이 된 그의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과제는 증권시장 정상화였다. “1989년 1000을 돌파한 종합주가지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시기였어요. 1992년 8월에는 459.1까지 추락했죠.”
그는 투자신탁회사 정상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가가 계속 내려가니 투신사에 막대한 평가 손실이 발생했어요. 그러니 주가가 조금이라도 회복되면 경쟁적으로 보유 물량을 팔아서 유동성을 확보하기 바빴죠. 주가가 오를 수 없는 악순환이었어요.” 투신사를 살리기 위해 거센 반대에도 공적 기금 투입을 결정했다. “한국은행 총재가 특별 융자에 반대하며 사표를 내겠다고 했죠. 회의실 문을 잠그고 네 시간 동안 격론을 폈고 ‘국회 동의를 받아 오면 특별 융자를 집행하겠다’는 답을 얻어냈어요. 김영삼 대표와 독대하며 ‘특별 융자를 안 하면 다음 대통령 선거는 해보나 마나’라고 단언해 겨우 동의를 얻었죠.” 그는 투자 심리가 좋지 않은 상황에도 증권거래소를 직접 방문했다. “주가가 낮은데 거래소에 방문했다간 봉변을 당할 것이라며 실무자들이 만류했어요. 하지만 ‘때리면 맞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사전 예고 없이 거래소에 갔죠. 직원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하자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주식시장도 회복했고 통화도 안정됐죠.”
이용만 전 장관은 공직을 삶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왔다. “이북에서 홀로 내려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제게 공직은 젊은 날 저를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고 자극이었어요.” 후배들에게는 무슨 일이든 성실히 임하라고 강조한다. “내가 맡은 일만큼은 일인자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해요. 온 힘을 쏟아야 하죠.”
올해 92세인 이용만 전 장관은 5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산업화의 격동기에 한국 경제를 이끈 경험을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손자가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요. 영상으로 일생을 기록하려 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죠.” 그는 자신의 일생 전반을 정리해 전하는 영상을 기획 중이다. “아직 옛날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답니다.”
글 | 이재윤 기자 jylee@
사진 | 박인표 기자 inpyo902@
사진제공 | 이용만 전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