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50대 남성이 70대 어머니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일이 일어났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범행 1년 3개월이 지난 후에서야 범인 채 씨는 경찰에 자수했다. ‘엄마를 보내드리고 싶다,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말하며. 친할머니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치매를 앓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건망증 정도의 증상이었지만 점점 심해졌다. 가끔은 할머니의 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자다가 문을 열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멍하니 길에 서 계시기도 했다. 결국 나도 기억하지 못하신다. 처음엔 내 얼굴을 보고 한
꿈과 도전이 가득한 세대, 20대. 그리고 그 20대를 부르는 청년이라는 단어. 하지만 청년, 우리가 사회에서 갖고 있는 이미지는 암울하기만 하다. 대학 등록금 내기도 버거워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힘들더라도 같이 해야만 하는 세대, 취업 문턱이 높아 쉽게 취업하기 힘들고 취직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하는 세대, 또 한편으로는 도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세대. 그런 세대가 바로 우리 20대였다. 가끔은 우리에게 따끔한 지적이 오곤 한다. 한 칼럼니스트는 ‘욕심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늙음은 추하지만, 욕망하지 않고 갈구하길 포기
#1 정의로운 복수 복수했다. 3년 동안 바다 아래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304명의 분노와 억울함이 조금이지만, 드디어 풀렸다. 분노와 억울함이 향해있던 그 사람은 복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진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등의 행위의무까지는 필요 없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세월호 사건이 탄핵의 사유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가끔 정의(正義)는 법률적 정의(定義) 위에 있다. ‘진정한 국가 지도자는 국가위기의 순간에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대학교, 지하철, 백화점, 대형마트, 병원 등 일상적 공간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화학세제는 안전할까. 그런 의문에서 이 기사는 출발했다. - 한겨레21 기사 도입부 ‘그런 의문에서 이 기사는 출발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의문, 그 의문 하나로 기자는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심층 취재했다. 그로 인해 유해 물질에 노출돼 있던 수많은 청소노동자들은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됐다. 그 하나의 작은 의문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기었다는 생각에 이 문장만 수백 번 곱씹었다. ‘그렇지,
‘고용률 70%를 달성하겠다’, ‘늘지오, 일자리를 늘리고 지키고 그 질을 올리자’18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은 청년 실업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대안을 내놨다. 청년들은 정말 조그마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그마한 희망은 우르르 무너졌다.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고 청년은 다시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됐다. 37.1%의 청년은 일을 하더라도 빈곤한 상태인 근로빈곤, 불안정 고용을 겪고 있다. 또 서울대에서는 ‘흔들리는 20대: 청년심리학’, 서경대에서는 ‘실패학’이라는 강의를 통해 청년들은 언젠간
심리부검, 자살자의 심리재구성효과 좋지만 법적 근거 미비경찰과의 협조도 필수적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망 당일 그들의 상태는 어땠을까. 혹시 주변 사람들에게 신호를 남기지는 않았을까. 심리부검을 통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심리부검은 자살 전 일정 기간 동안의 심리적 행동 변화를 재구성해, 자살의 원인을 추정하고 자살자의 상태를 분석하는 방법이다. 유가족, 지인 등 주변인의 진술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심리부검은 1986년 핀란드에서 처음 도입됐다. 도입 후 핀란드는 1990년 10만
‘하루 37명 극단적 선택…자살률 12년째 OECD 1위’, ‘우울증 환자 10명 중 9명 치료 못 받는 나라’ 자살과 우울증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기사들에 무뎌져서일까. 자살은 어느새 사회에서 심각하지 않은, 익숙하고 당연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인 우울증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도움을 받으면 이겨낼 수 있는데도,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살을 고민을 하고 있다.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우울증과 자살은 높은 연관성이 있다. 2015년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시위가 화합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우리 사회의 시위 문화는 시간이 흐르며 같이 변해왔다. 격렬하고 투쟁적이었던 시위는 2002년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평화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촛불집회는 최근 다시 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공권력과의 충돌을 시위대 스스로 나서 방지하고 혼자, 가족 단위로 부담 없이 참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다양한 문화 행사도 곁들여지며 시위의 양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투쟁에서 평화로, 그리고 축제로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시위는 운동권 조직이 주도하는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격렬
‘박근혜는 하야하라.’ 시민들은 한마음으로 외친다. 청소년, 편의점 알바생, 아이를 둔 엄마, 장애인들도 힘차게, 그리고 조용히 국민의 목소리에 힘을 더하고 있다. 자신들이 주축이 될 사회를 위해, 노력하면 성공하는 사회라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에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혹은 자신들의 생사를 위해 그들은 한마음으로 외친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투표권만 없을 뿐, 우리도 주권자입니다]대구 와룡고등학교 손진욱 학생회장 인터뷰- 시국선언을 하게 된 계기는“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어야 할 청소년들이 이런 정치현안에
군 복무 중일 때, 한 군사재판에 정병으로 참여했다. 두 명의 간부가 찜질방에서 여자 한 명을 성폭행한 사건이었다. 두 명의 피고인은 재판 내내 억울함을 호소했다. 피해자가 먼저 접근했지만 갑자기 돌변해 피해자인 척 연기한다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는 법정에 소환됐다. 성폭행 피해자가 증인으로 나설 때 피고인과 마주치지 않도록 피고인은 잠시 격리시킨다는 원칙으로 인해 피고인 둘은 잠시 법정을 벗어났다. 방청석에 있던 참관인들도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피해자의 증언이 시작됐다. 피해자는 범행의 과정과 심경을 빠짐없이, 그리고 흐느끼며
서울대 시흥캠퍼스,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같은 사업에서 대학 본부가 학생들과 소통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그 원인으로 ‘학생을 대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점’ 등이 지적되지만, 대학 본부의 인식 변화를 제외하고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대학 학보사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학보사 스스로가 전문성과 보도 역량을 갖춰야 한다.신문사만의 논조를 정해야서울대 시흥캠퍼스 사안에 대해 서울대 학보사 ‘대학신문’은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사설을 싣고 취재기사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교감하는 의식인 장례. 하지만 이런 장례마저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 들어와 버렸다. 고독사하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이 있어도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시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치러줄 가족, 지인조차 없는 무연고자들은 바로 화장돼 무연고 추모의 집에 10년 간 보관된다. 장례가 갖는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일까. -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박진옥 사무국장 | “크게 두 가지의 장례가 있어요. 기초생활수급자 대상 장례지원, 무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