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적이지 않아.” 이 말을 지난 2년 동안 끊임없이 들었음을 고백한다. 기사에서 학생들의 주장을 크게 다뤘다는 이유로, 관계자의 ‘적절한’ 해명을 싣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는 학교 관계자부터 동료 기자까지, 말하는 이는 달랐지만 따라오는 말은 언제나 비슷했다. “중립성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잖아. 삼류가 되면 안 되지.”저널리즘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마도, 계속 모를 것이다. 미국의 대학에서 미디어학을 연구하고 고국의 교단에 선 이들도 잘 모르겠다는 그 이론을, 일개 미디어학 이중전공생인 내가 어떻게 알 수
총장님. 지난주 금요일에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고향 부산에 계신 아버지의 안부 전화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대뜸, 어느 일간지의 기사를 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울대의 교수님과 연세대의 총장님, 그리고 우리 학교 총장님의 ‘3각 대담’이었다고 하셨죠. 그러고는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 좋은 총장이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기사를 읽지 못했던 터라 뭐라 대답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다시 전화하겠다는 약속만 드렸습니다.총장님. 그 기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대담의 전반에 걸쳐 파괴적 혁신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더군요. 입학식에서도
고대신문이 2015년 학내 10대 사건을 뽑았다. 고려대학교의 2015년은 큰 사건 없이 지나간 1년이면서도 의미를 되짚어야 할 사건이 많은, ‘정중동’의 한 해였다.사진| 고대신문 DB 19대 총장에 염재호 박사 취임 올해는 염재호(정경대 행정학과) 교수가 본교 제 19대 총장으로 취임한 첫 해다. 2월 27일 열린 취임식에서 ‘개척하는 지성, 개혁하는 고대’를 내세운 염재호 총장은 두 학기 동안 학사제도와 행정체계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염재호 총장은 취임 이후 학사제도 개편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 말했다. “요즘 페미니즘은 너무 급진적이지 않나요? 사회 구성원이 용인할 수 있는 내용과 방법으로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해야죠. 자꾸만 극단적으로 행동하니까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자 다른 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인정한 페미니즘’만 하자는 거죠?”대타협이 대세다. 노사정이니 여야니 틈만 나면 대타협 타령이라 이젠 지겹기까지 하다. “타협했다”고 하지 않고 “대타협을 이뤄냈다”는 포장을 해대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 더 많이 가진 자에게 구걸해 그럴듯한 약속을 받아냈다는 의미다. 비단 기성세대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에는 2008년 광우병 집회 이후 최다 인파가 집결했다. 주최 측 추산 13만 명, 경찰 측 추산 8만 명이 집결한 이번 총궐기에서 참여자들은 재벌책임 강화, 농업, 민주주의, 청년학생, 세월호 등 11대 요구안을 외쳤다.하지만 정작 집결 장소로 지정됐던 광화문에는 한 발짝도 디디지 못한 채 총궐기는 마무리됐다. 이후 ‘불법폭력시위’라는 프레임까지 더해져 비판여론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민중총궐기의 의의는 무엇이었으며 어떤 숙제를 남겼을까. 총궐기에 참여했던 학내 단체 구성원과 20일 좌담
유난이었다. 토요일이 오기도 전에 온갖 ‘갈등’이 터졌다.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이번에야말로 뒤집자는 구호 아래 사람들을 모았다. SNS에도 학교 게시판에도 온갖 자보가 붙었고 집회 꽤나 다닌다는 사람들은 “이번에 가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경찰은 강경대응을 강조하며 맞불을 놨다. 언론은 시위대가 쇠파이프로 의경을 가격하는 장면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냈고 일부 사람들은 “또 불온세력이 국가를 뒤집으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그래도 평온한 금요일이었다. 내일, 광화문에서 ‘민중’ ‘총궐기’가 있다고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강의
본지 편집국은 한 학기마다 구성원이 조금씩 바뀐다. 임기를 채운 기자들이 나가면 새로운 얼굴들이 빈자리를 메운다. 창간 당시로부터 68년이 지난 지금, 2015년 2학기의 편집국은 어떤 모습일까. 편집국 내부 자체 설문조사를 실시해 의미 있는 숫자들을 뽑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유쾌한 방법으로 현재의 편집국을 소개한다.
6월 어느 날, 손목시계가 고장 났다. 2년 넘게 차던 시계가 없어지니 손목의 허전함이 적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과반 후배가 팔찌를 선물했다. 세월호 사건 500일 당시 안산에 다녀오며 샀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시계가 없어진 손목에 노란색 팔찌를 찼다. 시계를 보던 버릇이 남아있어 손목을 돌릴 때면 ‘Remember 20140416’이라는 선명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고장 난 시계가 내 서랍장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 역사의 시계마저 고장 난 모양이다. 시대를 거스르는 발상과 폭언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정부가 국사 교과
보건복지부는 7일 내년 12월부터 담뱃갑에 경고그림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하는 국민건강증진법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다고 밝혔다. 2014년 9월 발표된 ‘범정부 금연종합대책’의 후속 정책으로 이번 개정안을 제시한 정부는 담뱃값 인상, 금연구역 확대와 더불어 흡연자 규제를 본격적으로 강화하는 모양새다.하지만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정책을 두고 ‘모양내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책시행 이후 지금껏 흡연율 하락이 미비해 세수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흡연자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진행된다는 이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치며 분신한 최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하려다 경찰과 마찰이 있었어. 그러다가 소녀상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후유증이 있나봐.”병원을 다녀왔다는 전태삼(남·66) 씨에게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1970년 11월, 형의 죽음을 신문으로 접해야했던 한이 남아서였을까. 지금도 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그를 만나 전태일과 청년의 길을 물었다. 형에 대한 기억을 묻자 그는 청계천을 떠올렸다. “내가 11살 즈음 13살이던 형과 청계천 곳곳을 쏘다니며 방비, 적쇠, 솔 같은걸 팔고 그랬어. 용두동에서
청년이 있었다. 어머니가 쥐어준 차비로 아이들에게 풀빵을 나눠주던 청년은 캄캄한 밤길을 걷고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청년을 나무라던 어머니가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거란 어머니의 질타에도 청년은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청년은 어머니께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못 다한 일을 이뤄 달랬다. 어머니는 이 한 마디를 끝까지 붙잡았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식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다독이고 같이 울었다.어머니가 떠난지 꼭 4년이 지났다. 어머니와 청년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청년을 이야기했다.
1970년 11월 13일, 청년 전태일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 공터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못 다 이룬 꿈을 꼭 이뤄달라”는 아들의 유언에 따라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항상 노동자와 함께한 이소선 어머니는 2011년 9월 3일 아들의 곁으로 갔다.전태일 재단(이사장=이수호)은 전태일 45주기와 이소선 4주기를 맞아 2015년 9월 3일부터 11월 13일까지를 ‘전태일·이소선 추모기간’으로 정했다. ‘세상의 모든 전태일, 하나 되는 불씨’의 구호아래 2015년 청년 노동자는 어떤 환경을 마주하고 있을까. 전태일 평
12일 광주지방법원은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2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날 수원지방법원 역시 같은 판결을 내렸다. DMZ에서 폭발한 지뢰가 북한군의 목함지뢰와 일치한다는 국방부의 발표 직후였던 탓인지 여론은 병역거부자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다. 무죄판결을 다룬 한 포털의 뉴스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지뢰제거반으로 활용하자”는 댓글이 가장 많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병무청의 통계에 따르면 신념이나 종교 등 개인의 양심적 판단에 근거해 병역을 거부하는 인원은 매년 약 600명에 달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 대체복무법안을 발의한 계기가 궁금하다“대체복무제를 최초로 발의하신 임종인 변호사와 같은 법무법인에서 활동하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변호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으로 활동했는데 당시에는 한명숙 국무총리가 ‘비전2030 국가인적자원 활용방안’을 발표하고 국방부도 대체복무제 도입방안을 발표하는 등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인정하기 위한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 과정에 참여하며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고 그것이 법안 발의의 토대가 됐다.”- 입법 활동을 하며 아쉬운 점이 있다면2008년에 정권이 교체된 후 정부는 병역
- 변호사 시절부터 병역거부자 변론을 해왔다“1980년 고대 대학원을 수료하고 군 법무관 시험에 합격해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10년간의 군 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 활동하던 중 2001년에 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특집기사를 마련하니 글을 써달라는 요구를 받게 됐다. 군 법무관 시절의 경험을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돌이켜보니 2000년대 이후 여러 민주화의 진전 속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이
문득 그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도, 방법도 각각 다른 그들에게서 법정에선 이야기하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당당했다. 이름도, 얼굴도 숨기지 않았다.20대의 시기에 양심에 따라 소수자의 길을 선택한 그들에게 20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고민을 해달라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고민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고민을 할 수 있을까. 박유호 (28, 입영거부)왜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됐냐는 질문에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병역거부자들의 진지한 양심을 헌법적 가치로 보호해야 한다고 확인해 주십시오.”(청구인 측 오두진 변호사)“위헌 결정이라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방법보다 입법을 통해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국방부 측 서규영 변호사) 헌법재판소가 지난 10년간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 조항의 위헌 여부를 숙고하는 동안 국회는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하는 법안을 논의해왔다. 17대부터 18대까지 4개의 법안은 폐기됐고 19대 국회에서는 1개의 법안이 국방위원회에 묶여있다. 그 사이 많은
최근 예능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쿡방(Cook+방송)’ 열풍이 불며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현대인이 지닌 가장 큰 고민은 점심 메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우리 주변에는 많은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하지만 먹거리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맛과 가격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먹거리를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각 단계의 주체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인 ‘관계망’ 역시 주목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먹거리 관계망’은 과연 무엇이고 본교 구성원들은 어떤 먹거리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을까
1월 18일, 안암총학 중앙운영위원회(위원장=서재우)는 ‘학생자치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심사하는 특별위원회’인 학생자치특별위원회(위원장=고준우, 학자특위)를 설립했다. 현재 학자특위는 선거시행세칙 개정안과 전학대회 개편안 논의를 진행하는 등 학생자치 싱크탱크로 기능하고 있다. 그들이 평가하는 안암총학은 어떤 모습일까. 4명의 학자특위 위원들과 함께 안암총학의 반년을 짚어봤다. - 부정선거 논란 후에도 안암총학에 대한 무관심은 여전하다고준우 | “전대 안암총학인 ‘고대공감대’가 복지사업의 유지와 확장에만 집중하며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