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막걸리 주점인 ‘가정집’을 운영하다가 87년 이후 ‘신당동 떡볶이’를 운영해 온 유병우(남·67) 씨. 이제는 쉴 때가 됐다는 생각에 32년 가까이 계속해온 장사를 접기로 했다는 유 씨의 얼굴엔 내내 서운한 빛이 어렸다. 고려대의 변천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호탕하게 웃는 그를 만나봤다.

학생들과의 사이가 남달랐다고 들었다
남달랐지. 난 장사보다 학생들하고 어울려 노는 걸 좋아했어. 학생들이 주는 술 받아먹고 나도 따라주다 보면 어느새 만취해서 드러눕곤 했지. 그래서 마누라가 살림은 어떻게 꾸릴 거냐고 바가지를 많이 긁었어. 허허. 외상도 수두룩하게 받았지. 학생증 맡기고, 시계 줄도 풀어 놓고. 돈은 별로 못 벌었어.
지금도 사회에 진출한 졸업생들이 여길 자주 찾아와. 결혼해서 아이들 데리고 오기도 하고. 변호사 개업했다고 와서 인사하거나, 개인 사업으로 사장이 된 친구도 있어. 한번은 단골 학생 결혼식에 초대받기도 했지. 다시 술집을 한다고 해도 예전 같이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싶어.

아드님은 연대생이라고 들었다
우리 아들이 축구선수인데 고등학교 때 연세대가 스카우트를 해버렸어. 나는 정작 고대 앞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말이지. 그래서 아들 얘기를 할 때엔 연고전이라고 했다가, 다른 때엔 또 고연전이라고 말하곤 해. 우리 아들 때문에 고대가 축구를 2년 연속으로 졌어. 1997년에 우리 아들이 1골 넣어서 1:0으로 지고, 다음 고연전에는 1골 넣고 하나 어시스트해서 2:0으로 또 지고. 그때 우리 아들이 연대 축구부 주장이었거든. 이런 얘기를 고대생들한테 했더니, 그 다음날부터 장사에 지장이 있더라고(웃음).

변해가는 고려대와 그 주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지금은 중앙광장이 들어섰지만, 난 운동장 있었던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 젊은 친구들이야 안 그렇겠지만 우리처럼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뭐든 바뀌기 전의 모습을 그리워하게 마련이지.
특히 상권이 정대후문으로 옮겨가면서부터는 정문 앞 상인들이 다들 어려워졌어. 아무래도 도로 개통되고 지하철 들어서니까 그쪽이 편하겠지. 여기도 고려대역이 있긴 하지만 길도 건너야 하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니까.
그런 생각 하면 착잡해. 옛날 학생들이 그립기도 하고. 같이 술잔 기울이던 그 애들이 지금 있었다면 어땠을까, 뭐 그런 생각도 해 보고. 사실 여기 집들이 다 옛날 집들이거든. 공간이 좀 넓으면 다른 것도 들어올 수 있을 텐데 아쉬워. 이런 건 같이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

정든 곳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모처럼 학교에 들러 나를 보러 왔다가 그냥 돌아갈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해. 그 허전할 마음들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파. 분명히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을 텐데…….
대학교와 그 주변 지역은 공동운명체라고 생각하거든. 제기동은 동대문구이기 때문에 성북구인 고려대와 다른 구에 속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같이 붙어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함께 겪은 곳이야. 그러니까 학생들이 정문 앞에 애정을 좀 갖고 찾아줬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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