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표준영정
‘논개(論介, 1574~1593)는 진주의 관기(官妓)로 계사년에 왜적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자 촉석루 아래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했다’
-광해군 13년(1621년)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조선의 의기(義妓),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지난달 4일 윤여환(충남대 회화과)교수가 제작한 논개 영정이 국가표준영정(제79호)으로 지정됐다. 기존의 논개 영정은 우리나라 근대 6대 화가에 속하는 이당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선생이 그린 작품이었다. 하지만 김 선생이 친일화가란 이유로 논란이 빚어지자 경남 진주시와 전북 장수군은 논개 영정을 새로 작업하기로 결정했다. 윤 교수가 완성한 논개의 모습은 이전 영정과 여러 면에서 달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새로운 표준영정 속 논개는 어떤 고증을 통해 탄생했을까?

논개 고증 작업은 △얼굴 △화장법 △머리모양 △옷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옛 문헌에 기초해 이뤄졌다. 윤 교수는 “임진왜란 이전 대부분의 사료가 전쟁으로 소실됐고 남아있는 문헌도 내용이 제각각 달라 완성하는데 2년이나 걸렸다”고 말한다.

논개의 얼굴은 논개의 가문으로 알려진 신안 주씨(新安朱氏) 유전인자를 토대로 제작됐다. 윤 교수는 논개의 얼굴 모양을 찾기 위해 얼굴 연구소 조용진 소장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조 소장은 논개가 나고 자란 전북 장수군을 중심으로 40명의 신안 주씨 문중을 촬영, 각각의 얼굴을 150군데로 나눠 분석했다. 이를 통해 조 박사가 유추한 논개 용모의 특징은 △북방계형의 골격으로 얼굴하안이 길고 턱이 크며 이마는 좌우로 좁음 △쌍꺼풀이 없고, 눈 사이는 좁으며, 콧날은 낮은 편 △입은 크나 입술은 얇은 편 등이다.

윤 교수는 당시의 얼굴화장법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논개 표준영정의 얼굴화장은 ‘진수아미(?首蛾眉)’ 미용법을 따랐다. '진수아미'란 네모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을 일컫는 말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를 보면 황후 허황옥(許黃玉)이 김수로왕을 처음 만날 때도 ‘진수아미’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미용법은 고구려 벽화 뿐 아니라 조선전기 <하연부인상>, 신윤복의 <미인도> 등 많은 그림에서 나타난다.

논개의 가채(여성의 쪽진 머리에 가짜 머리를 크게 덧붙여 얹는 것)는 13차례의 수정을 거쳐 완성됐다. 새로운 표준영정은 가채 없이 쪽진 머리였던 김 선생의 논개 영정과는 달리 땋아서 위로 올린 모양을 하고 있다. 윤 교수는 “논개의 기품과 세련미를 표현하기 위한 가채머리의 고증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가채의 고증은 고전머리연구소 손미경 소장이 맡았다. 손 소장은 논개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사대부 변수(1447~1524)묘에서 출토된 목각인형 머리모양과 관련 서적을 참조해 가채를 재현했다.

논개의 복식은 ‘고전복식전문연구소’에서 제작했다. 복식의 고증은 경기도 광주군 안동김씨 묘에서 출토된 1560년대 의상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그림인 <호조랑관계회도(戶曹郎官契會圖)>를 참고로 이뤄졌다. 조선전기 여자의 옷은 전체적으로 품이 넓은 통형으로 저고리의 길이가 길고, 여밈의 위치가 깊으며 소매도 넓은 것이 특징이다. 논개가 순국한 당시가 7월이라는 기록을 토대로 여름의상으로 그려졌다.

한편, 윤 교수는 경남 진주시와 전북 장수군이 논개에 대한 기록을 두고 입장 차이를 보여 애를 먹었다고 밝혔다. 진주시는 논개가 몸을 던진 촉석루가 위치한 곳이며 장수군은 논개의 고향으로 양측은 각자 논개의 사당을 모시고 관련 행사를 활발히 추진 중이다. 진주시는 논개를 나라를 구한 의기(義妓)로 부각시키는 반면 장수군은 논개를 죽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변장하고 왜장을 죽인 열녀라 주장하고 있다. 진주시와 장수군은 각각 전해지는 기록을 바탕으로 주장하고 있다. 윤 교수는 “기생이냐 아니냐를 떠나 논개는 어려운 시기 나라를 구한 위인임에 틀림없다”며 “많은 시간을 투자해 표준영정을 완성한 것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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