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겨울, 일본 도쿄의 신오쿠보역.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 선로에 뛰어든 어느 한국인 청년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6.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흔적들은 더 많은 사랑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화창한 봄날, 캠퍼스에서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용기있는 청년으로 키운 두 분을 만났다. 이수현 군의 아버지 이성대(69)씨와 어머니 신윤찬(59)씨.

(사진 = 전혜진 기자)
어머니- 아파트에 살 때,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 놀이터가 보이거든. 그런데 어느 날 수현이 고함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보니까 수현이가 자기 친구를 올라타고 화가 잔뜩 나서 때릴 것처럼 주먹을 쥐고 있는 거야. 그래서 그만 하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리 불러도 듣지를 않아. 들어보니까 수현이가 “너 빨리 시인 안하나, 니가 잘못했지”라고 다짐을 받고는 내려오더라고. 나중에 들어보니까 그 친구가 반칙을 했대. 그래서 한 번은 봐주고 다음엔 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그렇게 한 거야. 그래서 수현이가 참지 못하고 그런거지. 그래도 칭찬 했어요. 아무리 화가 나도 안 때린 건 잘한 행동이라고. 그런데 아가 그러는 거야. “엄마, 때리는 건 폭력이에요. 폭력은 하면 안되는 거에요”라고. 조그만게, 그게 그래도 대견스럽더라구요. 그 때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이수현 군이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와 관련된 책들이 일본에서 출간되기도 했으며, 이수현 장학재단이 설립되고, 영화<너를 잊지 않을 거야>가 개봉되었으며 동시에 한국과 일본 양국의 훈장을 최초로 수여 받으며 고려대학교 최초의 명예졸업장의 수여자가 되었다.
어머니- 처음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반대했지. 영화라는 게 흥행을 띄기 위해 제작되는 게 많으니까.

아버지- 내가 반대한 이유도 그거지. 흥미를 위해서는 여자 관계도 엮고. 수현이 이미지가 그게 아니라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술적으로 찍겠다고. 시나리오를 써서 우리에게 보여 주겠다고. 마음에 안들면 다 수정을 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허락했지.

이수현 군은 한일외교의 1인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앉고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날의 비극은 그가 일본에 간 지 거의 1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그 날의 일을 ‘신오쿠보의 참사’라 부른다.
어머니 - 수현이가 신오쿠보역 근처에서 PC방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런데 사장이 컴퓨터를 잘 다룰지 몰라 고장 난 게 있으면 거의 수현이가 도맡아 수리했대요. 그 날 고장난 컴퓨터가 있어서 수리하다 원래 퇴근 시간보다 3-4시간을 지체한거야. 그러다 일이 일어난 거지. 사장이 와서 자기 때문에 수현이가 그랬다고 막 우는데, 아니라고 말했죠. 사람이,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아버지 - 컴퓨터가 고장만 나지 않았더라도. 일찍 마쳤다면 그런 일 없었을 끼라…….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해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어머니 신윤찬씨가 입을 열었다. “괜찮을 수 있겠어요. 죽는 날까지. 지금도 수현이 무덤 앞에 있으면 진짜 수현이가 이 안에 있나,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싶어요. 지구가 뒤집혀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분이에요. 그래도 수현이가 남기고 간 일들이 너무 소중하니까. 수현이로 인해 만들어 진 일이니까 우리 부부가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사진 = 전혜진 기자)
어머니- 제가 제일 겁이 나는 건, 사람들이 잊을까봐. 잊을까봐 그게 가장 겁이나요.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도, 수현의 책이 만들어지고 장학회가 만들어지는 것 모두 많은 사람들이 수현이를 위해 애쓰는 것이고 너무 고마워요. 사람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수현이.

아버지-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 무역학과에 이수현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각자 정신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몇 일 뒤 이수현 군의 추모비를 지날 때, 부모님께서 놓고 가신 화환을 보았다. ‘항상 수현이를 생각하며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항상 생각하며, 부모의 사랑이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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