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종강이다. 학생들에게 방학은 ‘떠남’의 시간이다. 수많은 고대생들이 배낭을 짊어지고 세계 곳곳으로 떠날 것이다. 좋은 일이다.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 줄의 글을 읽은 사람에 불과하다”고. 다만 한 가지, 길 떠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관광객(Tourist)인가, 여행자(Traveler)인가?

사람들은 흔히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이라고 믿는다. 일부 문인들의 글이 이런 감상적인 판타지를 부추긴다. “사물들은 도구성, 쓰임새에 국한되어 그 쓰임새 밖의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행은 때로 그 쓰임새를 지운다. 그래서 새롭게 보인다. 일 때문에 떠나는 여행은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여행이 아니다.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만이 여행이다”<좋은 꿈꾸기>.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정의다.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의 그것도 다르지 않다. “나는 그저 아무 목적 없이 떠돌았던 것이다. 그 정체 모를 허무와 같이. 나라는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여행이다”<허무의 기록-티베트 기행 산문집>.

하지만 서양 쪽의 시각은 좀 다르다. 그들은 관광(Tour)과 여행(Travel)을 구별한다. 키 포인트는 재미(fun)다. 관광은 재미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반면 여행은 ‘단순한 재미 이상의 무엇’의 뉘앙스를 풍긴다. 작가들의 정의는 좀더 직설적이다. 그들은 관광객과 여행자의 차이를 ‘그냥 보는 것’과 ‘이해하며 보는 것’의 차이로 설명한다. “여행자는 현재 보이는 것을 보는 반면 관광객은 보러 온 것을 본다”(G.K.체스터튼)거나 “관광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지만 여행자는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사람”(다니엘 부어스틴)이라는 정의는 자못 신랄하기까지 하다.

관광객과 여행자를 구별하는데 ‘Where’는 중요하지 않다. 관광객과 여행자는 같은 곳을 여행해도 다른 것을 본다. 또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느낀다. 아무리 오지에 간다 한들 ‘생각’이 없으면 쇼핑몰, 놀이공원을 찾아간 것과 다를 바 없다. ‘How’도 의미가 없다. 배낭여행을 한다고 다 여행자일까? 유명 관광명소만 찾아 다니며 블로그에 올릴 ‘증명 사진’ ‘셀카’ 찍는 데 여념이 없다면 그는 관광객이다. 잠자고 먹는 것 아껴 애써 모은 돈으로 마약 같은 ‘엉뚱한’ 재미를 찾는데 탕진하는 사람 역시 그저 관광객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Why’다. 어떤 ‘거창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여행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단순한 재미 이상의 무엇’을 찾아 떠났다면, 최소한 ‘내가 왜 여행을 떠났던가’에 대한 자의식만은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한다. 해외여행의 처음 자유화 됐던 80년대 말,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은 관광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은 기성세대의 섹스관광, 보신관광을 비웃으며 ‘진정한 여행’ 목표로 세계를 주유했다. 그 후배들의 여행이 점점 ‘묘하게’ 변질되고 있다는 소식을 더 이상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부탁한다. 고대생이여, 이번 방학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자가 되시라.

<滿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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