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찍이 시인 장정일은 이렇게 썼다.

 


  녀석의 하숙방 벽에는 리바이스 청바지 정장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쓰다만 사립대 영문과 리포트가 있고 영한 사전이 있고

  재떨이엔 필터만 남은 켄트 꽁초가 있고 씹다 버린 셀렘이 있고

  서랍 안에는 묶은 플레이보이가 숨겨져 있고

  방 모서리에는 파이오니아 앰프가 모셔져 있고

  레코드 꽂이에는 레오나드 코헨, 존 레논, 에릭 클랩튼이 꽂혀 있고

  방바닥엔 음악 감상실에서 얻은 최신 빌보드 차트가 팽개쳐 있고

  쓰레기통엔 코카콜라와 조니 워커 빈 병이 쑤셔 박혀 있고

  그 하숙방에, 녀석은 혼곤히 취해 대자로 누워 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않고1)

 


  그랬다. 열일곱 소년의 눈에 비친 그 세계는 천국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내가 20대가 되면 저런 방에서 신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곳이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그리고, 지금 나는 천국에 있다. 마시다 만 코카콜라 캔이 굴러다니고, 청바지 정장 - 나는 리바이스를 즐겨 입는다. 장정일님의 천국에 리바이스 청바지가 걸려있었기 때문에 - 이 한구석에 처박혀있는 나의 하숙방에 대자로 누운 채로. 이렇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않고 누워있다 보면 어릴 적 천장에 있던 무늬를 세다 지쳐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하숙방 천장 벽지 무늬는 너무 작아 알아보기도 힘들다. 무늬와 무늬 사이에 때가 얼룩져 또 하나의 무늬가 된 벽지는 혼돈 그 자체다. 가끔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주가 저런 모습이 아닐까하고 상상해본다. 그 사이에서 우주인이 되는 상상을 하고, 그러다 또 잠이 든다. 잠을 깨면 풍경은 늘 똑같고, 나는 또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생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 그 모든 자유가 있는 이곳은 유일한 나의 천국.

  바닥에 등이 배겨 더 이상 누워있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나는 그제야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바탕화면에 저장해놓은 각종 기업의 입사정보는 귀찮은 녀석들이다. 스물 일곱. 삶의 무게를 느끼기에 적지 않은 나이 앞에서 이 녀석들은 내 자유를 자꾸만 갉아먹는다.

  입사원서를 열 한 곳에 넣었다. 그리고 열 한 곳 모두 떨어졌다. 얼마 전에 끝난 유로 2008에서 사랑하는 나의 스페인이 우승했음에도. - 그것도 무려 예상을 깨고 44년 만에 - 화면 속에서 열 한 명의 사랑스런 축구선수들이 신나게 웃고 있을 때, 나는 열 한 번째 회사의 불합격 통지를 확인했다. 그 순간 나는 천장의 무늬들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무늬를 세어봤다. 밥벌이의 지겨움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다들 그랬다. 취업이 어렵다고. 우리는 88만원 세대라고. 믿지 않았다. 나는 다르다고. 중간은 넘는 학점, 적절한 영어실력, 1종 보통 운전면허 소지, 가장 자랑스러운 육군 병장 만기 제대까지. 이 정도면 취업은 거뜬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열 한 곳이 나를 거부한 순간, 깨달았다. 나도 별 수 없구나.

  “여보세요. 엄마, 나야.”

  “응, 아들. 웬일이야. 아들이 먼저 전화를 다하고.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엄마 뭐하나 해서 전화해봤어요.”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아들 공부만 생각해. 엄마는 다른 거 없다. 알지?”

  괜히 전화했다. 어울리지 않게 우울해진 것이 화근이었다. 엄마, 죄송해요. 엄마 아들은 공부만 생각하기에는 청춘이 아까워요.

  엄마와의 짧은 통화가 끝난 후 나는 또다시 천장의 무늬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무늬는 곧 하나의 세계가 되었고 나는 그 세계를 물고기처럼 유영(遊泳)하다 의식을 깜빡 떨어뜨렸다. 내 의식은 작은 파문을 그리며 조금씩 잔잔해져갔다.

 


2.

  꿈을 꾸었다. 명품 양복을 입고 어마어마한 대기업 건물을 활보하고 있는 나. 이런 게 인생의 참맛이지, 라고 느낄 즈음 뱃속의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정환이와 저녁 겸 술이나 한 잔 해야지.

  “야, 나다. 나와.”

  “어디로?”

  “어디긴.”

  통화시간 38초. 정환이와 나의 통화는 저렴해서 좋다. 가뜩이나 쪼들리는 판국에 통화료라도 아껴야지.

  빛 한 점 들지 않는 하숙방 형광등을 켜고,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요새는 시설이 죽여주는 원룸도 많지만, 가격 역시 죽여줘 나는 죽도록 컴컴한 하숙방에 산다. 그래도 죽지 않을 만큼 행복하다. 낮과 밤을 알 수 없어 가끔 수업에 결석한다는 것만 빼면. 하긴 정환이 놈은 키도 큰데 2평도 안 되는 고시원에 사느라 가뜩이나 굽은 등이 더 굽었다. 허우대만 멀쩡할 뿐 속이 부실해 공익 판정을 받은 그 놈. 처음에는 놀렸지만 이제는 부럽다. 군대는 아무리 잘 쳐줘도 이익이라곤 없는 장사니까.

  “이 새끼. 뭐한다고 이렇게 늦어.”

  소주 한 병과 김치찌개.

  “형이 옷 좀 입고 나오느라 늦었지.”

  “남들은 옷 벗고 잘 시간에 넌 옷 입고 나오냐. 누가 보면 너 업소 다니는 줄 알아, 임마.”

  잔에 넘치는 소주.

  “하긴 형이 잘 생겨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얼마나 부러우면 잔에 정이 넘친다.”

  짠하고 잔 부딪히는 소리. 목을 타고 흐르는 소주. 캬~하는 소리와 함께 해방감은 보너스. 

  “너 취업 준비한다고 요새 잠잠하더니, 갑자기 술이냐. 왜, 잘 안 돼?”

  “형이 잘 안될 리가… 있지. 하는 것도 없이 그냥 힘들다.”

  “20대도 꺾인 지가 옛날이고. 이제 30대를 바라보는 마당에 다들 그렇지 뭐.”

  “공익 주제에. 감히 병장 만기 제대 앞에서 인생을 논하냐.”

  “공익 주제라니. 이러니까 니가 멀었다는 거다. 너처럼 군대 가서 열심히 구르면 몸만 상하지 좋을 게 뭐 있어. 인생 한 방인데 몸 망가지면 끝이야.”

  연거푸 들이키는 술잔. 순식간에 비어버린 소주병.

  “야, 너 그러지 말고. 인턴 같은 거 하나 해라. 남들은 이력서가 2장이 넘어가네 어쩌네 하는 마당에 너는 마땅한 경력도 없잖아. 우리 과장 친구가 K일보 국장인데 인턴 구한다고 친구들한테 얘기 좀 해보라더라. K일보 정도면 나름 유명한데 뭐가 부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K일보? 거기 어용이라 언론 쪽 가려는 애들한테는 오히려 안 좋아. 그리고 나름 유명한 거지. 메이저급은 아니잖아.”

  “어쨌든 한번 해봐. 이력서 한 줄 추가하기에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제 새벽에 박지성 골 넣었냐. 웬일로 니가 나를 이렇게나 걱정해주냐.”

  “야. 말도 마라. 골은 무슨. 교체 10분 뛰고 끝났다. 어쨌든 내가 너를 걱정하는 이유는, 형이 오늘 돈이 없다. 내 말 뜻 알지?”

  역시. 정환이 놈은 나의 진정한 친구임에 틀림없다. 결국 내 지갑 속에서 세종대왕님이 나오도록 하고 마는 나의 진정한 친구.

 


3.

 ‘당신의 꿈을 펼쳐보세요. K일보 인턴 모집… 인턴 성적 우수자는 본보 입사시 특전 부여’

  정환이놈의 말이 맞다. 나는 뭘 믿고 지금까지 나의 취업에 이다지도 확신을 가졌단 말인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는 이력서의 학력, 병역, 자격증란 외에 경력란이 텅 비어 있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만 진심으로 내 이력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접수했던 것이 엊그제다. 내 상식에 의하면 ‘이력(履歷)’이란 말 그대로 ‘내가 밟아온 역사’에 불과할 뿐 그 역사 안에 인턴경력, 공모전 수상 기타 등등의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새로운 상식으로 무장했다. K일보 인턴경력을 시작으로 각종 경력을 이력서에 빼곡히 채우고 말리라.

  뿌듯하게 K일보 인턴사원 입사원서를 넣고 나는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달콤한 상상을 시작했다. 우선 K일보 인턴이 끝나면 대기업 인턴을 하고, 스터디그룹을 짜서 공모전을 해야지. 그것만 해도 몇 줄이냐. 무려 세 줄. 그 정도면 나를 떨어뜨린 회사들도 나 같은 인재를 못 알아 본 걸 후회하고 말겠지.

  ‘띠리릭~’

  누구야, 형이 신나게 미래계획 세우고 있는데.

 


  행정고시 패스한 자랑스런 동기 민희가 이번주 금요일에 크게 쏘겠답니다 참석 여부 답문 필수!

 


  민희.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결국 해내고 말았구나. 충분히 해낼거라 생각은 했지만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알싸하다.

  대학 입학 때부터 군대 제대 후까지 민희와 나는 우리 학번 캠퍼스 커플 1호로 모두의 부러움과 질시를 샀던 사이였다. 사랑에 있어 모든 처음을 함께 했던 우리는 너무 행복했고 사랑에 끝은 없다며 감히 영원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겪게 되는 사랑의 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군 제대 이후 삶의 의욕에 불타있던 나는 내 옆을 지켜주던 그녀를 잊고 말았다. 내가 그녀에게 표현하지 않아도 그녀는 나의 마음을 이해할거라 생각하면서,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조금씩 무관심해져 갔다. 그녀에게 이별을 통고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성인(聖人)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던 한 여자였다는 것을.

 


   참석 가능

 


  그녀의 첫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리라 생각하며 단숨에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1년만이구나. 민희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니 벽지 무늬는 물방울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눈이 자꾸만 간지러웠다. 눈이 빨개지도록 비비고 또 비비면서 바라본 천장은 비도 오지 않았는데 흠뻑 젖어있었다.

 

 

 

4.

  오랜만에 본 민희는 더욱 아름다웠다. 많이 예뻐졌다며 멋쩍은 인사를 건네고, 축하한다고 말하는 내 모습이 그녀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부디 배포 큰 남자로 비춰지길 바라며, 나는 신나게 웃고 마시고 떠들었다. 그렇게 웃고 마시고 떠드는 사이 시간은 훌쩍 지나 자정이 되었다. 자리를 파하고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바람만바람만 보며 내 가슴은 별이 박힌 듯 아려왔다.

  그 날 이후 며칠 동안은 기억이 없다. 미련이란 놈이 나를 가득 채워 독방에 갇힌 죄수처럼 멍하니 누워있었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아니, 잘해줄 자신도 없잖아. 그래도 예전보다 잘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정신 차려. 미련 없이 떠난 여자한테 끝까지 이러기냐.

  제길, 난 정말 미친놈이다.

  ‘띠리릭~’

 


   야, 너 K일보 됐댄다. 진짜 넣을 줄은 몰랐는데 나름 능력있는 걸~

 


  가끔씩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정환이가 내 애인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외로운 처지에 서로 돕고 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이 자식은 능력있으면 능력 있는거지, 앞에 붙은 나름은 뭐야 나름은. 어쨌든 합격이라니 이력서 한 줄 추가 축하기념으로 정환이 놈이랑 또 한잔 할까.

   ‘K일보 인턴사원 합격을 축하합니다. 오는 8일(수) 오전 9시 K일보 본사로 오셔서 안내사항 꼭 숙지 바랍니다.’

  8일이라. 응? 8일? 당장 내일이라니, 번갯불에 콩을 볶으시는구만 이 사람들. 정환이와 한잔은 인턴 이후로 미뤄야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알람을 맞추고 일찍 자야지.

  참, 그런데 양복이 어디에 있더라. 졸업사진 찍는다고 거금주고 산건데 그래도 입어볼 날이 오긴 오는구나.

  아침아, 어서 오너라.

 


5.

  K일보 앞. 아침 햇살을 받고 빛나는 통유리 건물은 마치 내 미래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부터 여기서 내 꿈을 펼치는 것이다. 가슴을 펴고 회전문을 힘껏 밀었다.

  ‘옆문을 이용해 주세요.’

  시작부터 순탄치는 않은 것 같다. 회의실을 찾아가니 벌써 사람들이 몇몇 와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자 직원이 전달사항을 말한다. 한명씩 호명할 때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라고. 안내사항 숙지라더니, 한 명씩 불러서 공지사항을 알려주는 건가. 대체 얼마나 비밀스러운 안내사항이길래. 불길한 느낌이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물씬물씬 피어난다.

  “이희귀, 아니, 이희규씨 안으로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엄청 큰 회의실에 아저씨 세 명이 앉아있다. 나를 쏘아보는 눈빛들이 심상치 않은 가운데 정적을 깨는 굵은 목소리.

  “우리 K일보에 들어오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정치부장이라는 가운데 아저씨의 경상도 억양 섞인 앙칼진 질문.

  “K일보에서 인턴과정을 하며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이번엔 경제부장 오른쪽 아저씨.

  “이력서를 보니 언론 쪽 경험이 전혀 없던데 들어와서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문화부장 왼쪽 아저씨.

  열 한군데 모두 서류에서 떨어진 관계로 면접 경험 전무(全無)인 나. 강펀치 세 방에 혼수상태. 우물쭈물, 어찌어찌 무조건 자신있다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호언장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청심환이라도 먹고 올걸. 안내사항 알려주기로 해놓고 면접하는 회사는 여기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가운데 아저씨의 한마디가 들렸다.

  “이희규씨. 세상에 패기만 갖고 되는 일이 맻 가지나 된다꼬 생각합니까. 아무껏도 없는 사람이 젊다고 패기만 넘치니 큰일났구마.”

  가운데 정치 아저씨. 처음부터 느낌이 별로 안 좋다.

  “이희규씨 이쪽으로 오셔서 자료 받아가시구요. 내일부터 정식 출근하세요. 그리고 저희 K일보에서는 각 인턴사원들에게 임의로 부서를 나누고 담당자를 정해 인턴과정을 실시하고 있어요. 이희규씨 담당은 강인구 정치부장님이시네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강인구 정치부장! 하느님, 이 어린양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참, 이희규씨. 내일까지 가장 관심 있는 정치 이슈에 대해 세 장 정도 써오라고 강 부장님
께서 전해달라고 하시네요.”

  결국, 하느님은 어린 양을 버리시고야 말았다.

 


6.

  한숨도 못 잤다. 머릿속에 마른 버짐이 핀 것처럼 내 뇌는 곳곳이 푸석푸석하다. 가장 관심 있는 정치적 이슈는 커녕, 정치에 전혀 관심 없던 나는 어제를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왜 내 손에 들린 A4용지는 왜 이렇게 초라하지?

  “뭐하노?”

  “예? 아… 예. 9시까지 오라고 하셔서 9시까지 왔는데요.”

  “숙제 해 왔나?”

  “예, 여기.”

  “저 짝 니 자리가서 컴퓨터 켜고 메신저 켜두라.”

  나는 후다닥 달려가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 창을 띄웠다. 창을 띄우고 10초 뒤, ‘띵동’하는 소리와 함께 강부장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름하여 ‘오늘 이희규가 해야 할 것들’. 클릭해서 내용을 열어보니 도대체 알 수 없는 내용의 할 일 20가지가 적혀있다. 가슴이 답답해오는 가운데 강부장의 외마디 고함이 들린다.

  “희규. 니 쫌 이리 와본나!”

  “예. 어쩐 일이신지…?”

  “니 이기 글이가? 발로 써도 이보단 낫겠구마. 큰소리 탕탕 치드니 이기 그 결과고? 니 단디히 들으라. 인턴이라꼬 봐준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라, 알긋나?”

  “예.”

  “알아들었으모 가봐라. 오늘까지 할 일 못 끝내모 퇴근 물 건너가는 줄 알그라.”

  나중에 알게 된 사실 하나. 강 부장은 별명이 강독사(毒蛇)다. 하는 말마다 맹독을 머금은 어금니를 가슴에 콕 박는 것 같아서 그렇단다. 100% 공감한다. 아니, 150% 공감. 나는 어찌 독사가 내 담당이 될 줄 모르고 그 앞에서 혀를 날름거렸단 말인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나는 내 가슴에 맹독이 서서히 퍼지고 있음을 느낀다. 독사. 이대로 내가 질 순 없지. 두고 보시죠. 시키는 일이 무엇이든 A+급으로 해드릴테니.

 

 

 

7.

  나의 바람과는 달리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도록 나는 아침마다 독사에게 물리고 또 물렸다. 니는 시간이 지나도 매양 그 모양이고?, 능력 안 되모 그만두라, 발로 써도 이보다는 낫겠구마 등등의 잔소리는 듣다못해 환청이 들릴 정도다. 군대에 있을 때 돼지 같은 선임이 해댔던 잔소리는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의 어금니는 가슴 곳곳에 날아들었다.

 


   김정환, 앞으로 니 걱정은 절대 사양하겠다. 이력서 한 줄 안 늘리고 말지

   힘드냐.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어 임마. 참어

   쉬운 일이 왜 없냐. 공익 있잖아.

   친구를 팔아 니 마음이 편하다면 마음대로 하렴.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 다 이해할 수 있

     단다. 이따 술이나 한잔할래?

   술은 무슨 매일 할 일이 산더미다. 12시 안에 집에만 가도 다행.

   오~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양인데. 파이팅이다!

 

  역시 정환이놈은 내 애인이다. 이런 때에 위로가 되는 사람은 이 녀석 뿐이다. 인턴 끝나고 월급 받으면 크게 한턱 쏴야지. 그런데 인턴이 며칠 남았더라.

  “희규! 니, 취재다. 광화문 앞으로 퍼뜩 가보그라!”

  취재? 이건 처음 듣는 할 일인데. 사무실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것 보다 훨씬 낫겠다. 그래, 기자란 자고로 발로 뛰어야지. 첫 취재라, K일보 입사 이후 최초로 가슴 속에서 설렘이란 단어가 둥실 떠올랐다. 좋아, 출동이다!

  김 기자님과 사옥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어? 그런데 지하철이 광화문역을 지나쳤다. 영문도 모르고 첫 취재를 하게 된 나는 그제야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저, 김 기자님 오늘 광화문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희규씨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왔어? 하여간 강부장님도 참 대단하시네. 오늘 광화문에서 대규모 촛불시위가 있어. 왜 있잖아 광우병 소고기 반대, FTA 반대. 뭐 그런 거. 며칠 전부터 한다고 예고했는데 노조까지 동참해서 크게 됐나봐. 60만명 가까이 왔다는데?”

  “네? 60만명이나 모였다구요?”

  60만이라는 숫자를 머릿속으로 그려봤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광화문 다음 역인  종로3가역에 내려 광화문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자 60만의 실체가 눈앞에 있었다. 거대한 촛불의 물결. 나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촛불이 흔들리는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미 FTA,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절대 반대!’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하고 있어요.’

  색색의 피켓이 눈앞에서 흔들리고 촛불과 피켓이 번갈아 하늘로 들려졌다. 아직은 어린 중학생들부터 넥타이 부대, 유모차 부대, 하이힐 부대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60만의 인파들은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홈 경기장에 온 관중들이 응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징그럽게 많이도 모였구만. 기자생활 10년 만에 이런 진풍경은 처음 봐. 일단 속보부터 때리고 올 테니까. 희규씨는 사람들한테 멘트 좀 따고 스케치 좀 해줘.”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앉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곳곳에서 모였고,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마음이었다. 광우병이 진실이든 루머든, 그들은 모두 그들의 이야기를 이 나라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들의 말은 모두 달랐지만 결국은 한 길로 통하고 있었다. 모두의 마음이 모이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한 길로. 시간이 흐르면서 촛불은 점점 사그라졌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점차 불타올랐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 장군은 얼굴에 보름달처럼 넉넉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8. 

  ‘루머에 선동된 시민들, 도심 한가운데서 불법 도로점거시위’

  응?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불법? 점거? 분명 평화로운 문화제였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저, 김 기자님, 기사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데요. 불법이라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희규씨가 아직 세상 보는 눈이 트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상황은 다르게 보일 수 있어. 특히 기자의 눈에 따라 기사는 달라지지. 이건 내가 본 상황인거고 희규씨는 아직 젊으니까 나랑은 보는 눈이 다르겠지. 희규씨는 심장이 아직 왼쪽에서 뛸 때니까.”

  K일보를 왜 어용(御用)신문이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건 분명 기만이고, 언론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강 부장님, 저 인턴 그만두겠습니다.”

  “니 뭐라꼬? 오늘 할 일이 그리 어렵드나? 갑자기 와?”

  “K일보에 실망했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일했는데 오늘 기사를 보고 꿈이 사라졌습니다.”

  “그라모 나름의 니 꿈이 몬데?”

  내 꿈? 갑자기 막막해졌다. 내 나름의 꿈이 뭐였지? 그러고 보니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할지, 연봉은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몇 년이나 근무하고 이직해야 연봉이 오를지 등 먹고 살 궁리만 했었다. 정말 ‘내 꿈’은 뭘까?

  “입에 꿀을 발랐나? 와 말이 없노?”

  “…”

  “이상한 놈이라카이. 니 때려치는 건 괜찮지만 일단 오늘 할 일은 다 해놓고 나간나. 알긋나?”

  “예.”

  이렇게 나의 인턴 중단 소동은 말만 꺼내보고 허무하게 끝이 났다. 자리로 돌아와 하던 일을 마저 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이희규, 네 꿈이 뭐니? 단순히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버는 것이 꿈이었나. 아니, 그런 건 꿈이라고 하기에는 계획에 가까운데. 초등학교 때 꿈은 대통령. 이유는 청와대에서 멋지게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중학교 때는 만화가. 김성모 작가 같이 재미있는 만화를 많이 그리고 싶어서. 고등학교 때는 대학생. 대학가면 놀아도 된다고 해서. 대학 때는…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이후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이 급속히 줄어들었고 이제는 취업을 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자 희망이 된 것 같다.

  내 나이 스물 일곱. 열정과 꿈, 낭만이 넘치는 젊음이 있는 나이다. 하지만 나는 88만원 세대의 전형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꿈을 잃은 삶은 정처 없이 걷는 어두운 길이라는 것을 나는 왜 잊고 있었을까.

  삶은 하늘에 매달린 달콤한 초콜릿이다. 하늘에 달린 초콜릿은 닿을 수 없이 멀어서 맛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초콜릿을 먹기 위해 노력한다. 좌절하고 또 좌절하면서도 달콤한 그 맛을 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내가 먹을 수 있는 또 다른 달콤한 것들은 조금씩 녹아서 사라지고, 나는 그 사실에 또 다시 절망한다.

  오늘부터 나는 내가 먹을 수 있는 달콤한 것들을 찾아야겠다. 더 이상 모두가 맛보기 위해 달려드는 초콜릿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말아야지. 행복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니까.

  “희규, 니 오늘 밤 샐라꼬 하나?”

  “예, 지금 거의 다 끝냈습니다. 30분 내로 보고하겠습니다.”

 


9.

  오랜만에 내 천국을 여유롭게 둘러본다. 지난 한 달간 잠만 자고 나가기도 바빠 제대로 둘러볼 틈도 없었던 내 천국. 맨유와 토트넘의 새벽 경기가 예정돼있는 오늘은 K일보 인턴 마지막 날이다. 내일 출근할 걱정 없이 오늘은 마음 놓고 축구 경기를 볼 수 있겠구나. 아울러 K일보 내 자리에서 몰래몰래 문자 중계로 봤던 프로야구 경기도 볼 수 있다. 나의 사랑 두산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지금, 잠실에 못 간 날이 며칠이던가. 기다려라 두산아, 형님이 간다!

  “강 부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니 오늘 마지막이라고 티 안내도 다 안다. 아주 기분이 날아가네. 날아가.”

  “아닙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이희규가 해야 할 일’ 모두 마치고 무사귀환하겠습니다!”

  “저리 방방 뜨고 싶어 어찌 참았는지 용하다카이.”

  강 부장의 비꼬는 말도 이제는 안녕이다.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들어왔던 K일보. 사실 그 꿈의 정체는 이력서 한 줄에 불과했지만 이력서 한 줄에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지난 한 달이었다. 그렇다고 인턴을 계속 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혹시 독사가 내 담당이 아니라면 또 모르지. 한 달 정도는 또 할 수 있을지도.

  ‘띵동! 이희규가 오늘 해야 할 일’

  올 것이 또 왔구나. 오늘만큼은 그간의 내공을 모아서 A+급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말테다. 어디보자, 어제 보내달라고 요청한 보도 자료가 왔나.

  ‘희규야, 꼭 와서 축하해주길 바랄게. 민희가.’

  민희가 보낸 메일이다. 근데 뭘 또 축하해달라는 거야. 고시 붙은 건 이미 축하했는데.

  ‘김철윤&박민희. 두 사람 하나되는 날, 소중한 분들을 모십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요새는 청첩장도 메일로 보낸다는 걸 민희를 통해 알았다. 청첩장 속에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민희.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결혼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

 


   정환아 이따 8시쯤 거기로 와라.

   야, 형 바빠. 너 인턴하는 동안 연애 시작했다.

   공익주제에 연애도 하냐. 나 오늘 인턴 끝나.

   일단 축하하고. 술은 내일 마시자. 미안. 여자친구가 오늘 꼭 보고 싶은 연극이 있대.

   그래. 연애 잘 해라.

 


  정환이마저 나를 버리는구나. 그나저나 짜식 몇 년 만에 하는 연애야. 부럽다. 나는 민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연애라. 올해가 가기 전에 한국시리즈에 함께 손잡고 갈 여자 친구가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이희규가 오늘 해야 할 일 20가지.’  

  독사가 마지막으로 전달한 할 일을 모두 마치고 K일보를 나오는 길. 끝났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뭔가 아쉽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걸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보니 어느새 내 눈 앞에는 이순신 동상이 서 있었다. 첫 취재, 첫 기사, 첫 신문…. 생각할수록 왠지 모르게 가슴이 한쪽이 뜨겁다.

  다시 독사가 나에게 “니 꿈이 뭐꼬?”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야구와 축구입니다. 하지만 야구와 축구는 혼자 보면 재미없는 녀석들이죠. 저는 사람들과 함께 야구와 축구의 재미를 나누는 축구, 야구 전문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하늘 저편으로 해가 넘어가고 붉은 그림자가 도심을 덮는다. 붉은 노을 아래 이순신 장군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내 인생 홈런은 지금부터라고.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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