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하늘의 청명한 햇살이 내리쬐던 그곳은 평화로웠다. 제법 쌀쌀한 날씨 탓인지 비교적 한산한 모습이었다. 커다란 묘목들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메마른 잔디는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정갈하게 쌓아올린 붉은 벽돌 건물을 보고 있자니 외국의 어느 고즈넉한 수도원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로 잘 알려져 있는 경기도 고양시 중남미문화원이다.

중남미문화원은 30여 년간 중남미 지역에서 외교관을 지낸 이복형(77) 원장과 그의 부인 홍갑표(75) 이사장 부부가 1994년 설립한 곳이다. 외교관 시절 이들이 각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유물과 함께 원주민에게서 직접 구하거나 벼룩시장을 통해 들여온 미술작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문짝부터 타일 바닥까지 어느 하나 직접 가져오지 않은 것이 없다고. 그래서인지 구석구석 섬세한 손길이 엿보인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멕시코풍의 아치형 목재 현관을 들어서면 분수대가 놓인 널찍한 홀이 나온다. 아즈텍 문명의 태양신 조각이 장식돼 있는 높은 천장으로부터 빛이 은은하게 쏟아진다. 흥겨우면서도 잔잔한 라틴 음악이 흐르는 박물관 내부와 성당에나 있을 법한 종교화 및 성물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때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홍갑표 이사장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일흔이 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얼굴엔 생기가 넘쳤다. 그는 기자에게 따뜻한 멕시코 차를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 터를 마련한 지는 어느덧 40년이 흘렀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처음엔 늙어서 전원생활을 할 요량으로 300원짜리 땅을 사서 1원, 2원짜리 묘목을 심어 길렀다. 그 묘목들이 지금은 훌쩍 커서 숲을 이룰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중남미 현지에서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한 수집품이 점차 쌓여가면서 박물관을 지어 이것들을 후세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화는 나눔이야. 소유가 아니야. 그림 비싼 거 가지면 뭐할 거니? 나누고 못 가면 그건 하나의 물질이지. 그림을 선별할 줄 아는 게 문화가 아니야. 생각이, 가슴 속이 문화적이라야 해” 스스로를 ‘문화복지사’라 부르는 이들 부부는 1993년 은퇴한 후 외무부 산하에 재단법인을 설립해 문화원을 기증한 뒤, 당시에 받은 퇴직금을 모두 쏟아 박물관을 짓기 시작했다. 건물 설계부터 작품의 배치까지 모든 과정은 홍 이사장이 도맡아 했다.

물론 어려움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박물관에 이어 1997년 미술관을 짓자마자 IMF가 찾아온 것. “문 닫기 일보직전까지 갔어. 전기값도 못 냈으니까. 울기도 많이 울었지. 하지만 고난은 축복이야. 고난을 통해 비로소 성장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그의 눈이 빛났다. “꿈을 꿔야 해. 꿈꾸는 덴 돈 안 들어. 내가 이만큼 멋있게 살고 싶다 하는 거. 무엇을 하고 싶다 하는 거. 뭐든지 자기 분야에서 1등만 하면 돼” 결국 중남미문화원은 아시아에서 남미 문화를 종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2005년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곳의 전시 작품들을 둘러보면 원주민들의 토착 문화와 스페인 침략 이후의 카톨릭 문화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살아 있는 중남미 그대로다. 현지에서 출토된 △토기 △석기 △직물 등의 유물은 수천 년 전 인디오들이 이뤄낸 고도의 문명을 짐작케 한다. 조각으로 표현된 성모나 예수의 얼굴은 원주민의 그것과 닮아 있다. 괴이하면서도 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200여 점의 멕시코 가면들은 전시품 중 단연 백미다. 마귀가 그려진 가면부터 △동물 △인어 △나비에 이르기까지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멕시코 동해안 지대의 또또낙(Totonac) 인디오들은 가면으로 얼굴을 덮음으로써 일상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이 해방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박물관을 나서자 성채의 안뜰처럼 아담한 정원이 펼쳐졌다. 바로 옆에 자리한 미술관에선 현대 중남미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품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화려한 꽃과 과일, 나뭇잎으로 풍성한 「생명의 나무와 태양」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빅토르 구띠에레즈 작가의 브론즈 조각들은 미술관 곳곳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섬세하게 수놓은 자수가 돋보이는 인디오들의 수공예 작품 몰라(Mola)도 눈길을 끈다. 그 외에 홍 이사장이 매년 현지에서 직접 사들여 오는 △액세서리 △도자기 △각종 골동품 또한 구경할 만하다.

(사진=곽동혁 기자)
미술관을 나온 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붉은 아치형 문을 중심으로 중남미 14개 나라의 조각가들이 기증하거나 이들 부부가 직접 수집한 작품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남녀가 껴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석조상 「포옹」을 비롯해 △브론즈 △대리석 △철 등 수십 여점의 조각들이 보인다. 또한 곳곳엔 청동 벤치와 탁자 등 쉴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주말과 공휴일엔 야외 스낵코너에서 멕시코 전통음식 ‘따꼬(Taco)’를 맛보는 것도 가능하다.

조각공원을 둘러본 뒤엔 이복형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구석구석 아름답다는 기자의 감탄에 그는 모든 공을 홍 이사장의 것으로 돌렸다. “내가 외교관 생활할 적에 우리 집사람이 외교관 춤을 같이 췄잖아. 그것이 끝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때 자기 춤을 추는데 같이 추자 이거야. 그래서 같이 추는 거야” 그는 요즘도 현직 외교관 시절 못지않게 주한 중남미 대사들과 만나며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인다고 했다. 비록 은퇴했지만 앞으로도 우리나라와 중남미의 관계가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남은 생도 여기에 바칠 거라 자신 있게 말하는 그들의 얼굴엔 알 수 없는 빛이 어렸다. 중남미의 유물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여러 장르의 미술작품을 감상함과 동시에 경치도 즐기고 전통음식도 맛볼 수 있는 곳, 외교관 부부의 ‘나눔’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중남미문화원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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