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이 문화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 마을이 있다. 마포구 망원역에서 내려 10분쯤 걸어가면 나타나는 성미산마을. 지난 1일(수)과 2일(목) 본지는 주민들 스스로 가꿔나가는 도심 속 마을공동체, 성미산마을을 찾았다.

1일(수) 저녁 6시에 찾은 <성미산마을극장> 사무실에서는 극장기획팀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유창복(48) 극장장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은 성년의 날을 기념하는 공연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지만 한 시간이 넘는 회의에도 지치지 않고 모두 집중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유창복 극장장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멋쩍게 웃고는 인근 카페로 안내했다. 마을 주민들이 1년 동안 준비해 지난 2월 개관한 성미산마을극장은 시민단체 공간 ‘나루’에 자리 잡았다. 두 달 간 진행된 개관 페스티벌에서 △음악회 △영화 △연극 △패션쇼 등을 선보였다. 지난달 29일(일) 있었던 개관 페스티벌 마지막 공연은 마을 극단 ‘무말랭이’가 장식했다. 

유창복 극장장과 함께 들어선 마을카페 <작은 나무>는 보통의 카페와 달랐다. 유 극장장이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어린 초등학생들은 수시로 드나들었다. <작은 나무>는 유기농아이스크림, 공정무역 커피 등을 제공하며 마을 주민들의 복합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쪽 벽면에는 카페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 준 주민과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목각판이 걸려 있었다. 그들이 카페의 공동대표다.

유창복 극장장은 성미산마을에 산 지 14년 째 되는 원로 주민이다. 성미산마을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4년,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던 주민들이 공동육아를 계획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조한혜정(연세대․사회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육아체험프로그램을 만들고 주민들끼리 자금을 모아 허름한 양옥집을 얻었다. 어린이집 운영자는 대의제가 아닌 제비뽑기로 선출해 돌아가면서 맡았다. 유창복 극장장은 “대의제로 대표를 뽑으면 뽑힌 사람이 권력을 갖기 쉬운데 직접민주제 방식을 택하면 모두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다”며 “서로 민주적으로 회의하면서 자연스레 사적인 고민도 털어놓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공동육아로 가까워진 주민들이 더욱 돈독해진 것은 지난 2001년 성미산지키기운동을 함께 하면서부터다. 당시 서울시는 성미산을 헐고 배수지를 설치한다는 계획을 발표해 주민들이 다 같이 성미산 지키기에 나섰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단을 배포하고 촛불시위, 집회도 2년 간 진행했다. 외부에 성미산지키기운동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주민 세 명이 지역구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결국 성미산은 헐리지 않았고 이후 마을에는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을 비롯해 △도토리방과후 △마포FM △차병원 등 자치적 모임이 생겨났다. 건물은 마을 주민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출자금을 모아 공동 설립했다. 유 극장장은 “성미산마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 게 아니라 살면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직접 협동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저녁 8시가 될 무렵, 갑자기 긴 머리를 한 청년이 기타를 매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작은 의자에 앉아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 저녁 이곳에서는 동네 가수와 주민이 어울리는 ‘수요작은음악회’가 열린다.

이튿날 낮, 다시 성미산마을을 찾아갔다.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두레생협>에는 아주머니 몇 분이 꼼꼼히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현재 마을 사람들 중 조합원으로 가입된 인원만 최소 2000명으로, 마을 주민들이 원하는 제품을 요구하면 생산지에서 직접 물건을 공급받는다. 1년에 자체적으로 네다섯 번 정도 소식지를 만들고, 제품 제조 공장에 불시에 찾아가 위생 상태를 확인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카운터에서 일하고 있던 활동가 이현정 씨는 “우리끼리라도 투명한 관계 속에서 믿고 살 수 있는 제품을 공유하려는 목적에서 시작했는데 많은 주민들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바로 옆에 위치한 <되살림가게>에선 서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교환한다. 여기선 일반화폐와 함께 지역화폐 ‘두루’를 사용한다. 한 물건을 기증하면 그 가치의 50%를 두루로 돌려받아 나중에 물건을 살 때 물건 값의 50%를 두루로 낼 수 있게 해 통용하고 있다.

가게에서 나와 성미산 쪽으로 올라가니 5년 전에 설립된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가 있었다. 성미산학교는 일반적인 빌라 형식의 건물에다가 운동장도 없었지만 교실이 곧 운동장이나 다름없었다. 교실과 복도의 문턱은 매우 낮아 개방된 구조였으며, 아이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공부 아닌 공부를 하고 있었다. 성미산학교 박복선 교장은 “성미산학교는 마을 전체의 학습센터 구실을 하고 있다”며 “마을에 사는 예술가들이 아이들에게 음악, 미술, 체육을 직접 가르치고 학부모가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청소년문화공간 <꿈터>가 있다. <성미산학교>의 체육선생님이자 <꿈터>에서 택견을 가르치고 있는 이홍표 선생님은 “꿈터는 단순한 학원 개념이 아니라 아이들과 어른들이 자유롭게 와서 쉴 수 있는 ‘마을 학교’와 같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꿈터>에서 나오자 하늘엔 어스름이 껴 있었다. 현재 성미산마을은 평온하지만은 않다. 홍익대 재단에서 성미산을 헐고 그 자리에 홍익대 부속 초․중․고를 옮기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또 다시 힘들게 성미산지키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녹색 플래카드가 마을 곳곳에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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