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8일, 4천여 명의 본교생들은 교문을 열고 달려 나가 ‘학원의 자유를 달라’, ‘민주 반역은 사죄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했다. 이날 해산하던 시위대가 깡패에게 피습당한 사건은 4.19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대통령 하야 요구한 6.3항쟁
1964년 6.3항쟁에서도 본교생이 선봉에 나섰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의 굴욕과 저자세, 일본 측의 오만과 고압적 태도가 불거지자 △박정훈 △최장집 △이기명 등은 이를 비판하며 대통령 하야 권고안을 제기했다. 6월 2일 본교생 2천여 명은 ‘주관적인 애국충정이 객관적인 망국임을 직시하고 박정권은 하야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섰다. 이날 본교생 206명이 연행됐으며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한 10명의 학생에겐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일부는 군사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내란죄를 덮어쓰기도 했다.

6.2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은 체포령을 피해 대부분 은신했다. 그러나 다음날 이들을 포함 4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박정희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안암동 로터리, 신설동, 동대문 등지에서 피 흘리는 학생들을 목격한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시위는 점차 대규모화됐다. 본교 선발대가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하고 뒤이어 성균관대, 동국대 등이 합세했다. 이날 시위엔 28개 대학생 1만 5천여 명, 일반 시민들을 합하면 총 3만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4.19 이후 처음으로 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대규모 시위를 접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6.3시위를 강제 해산했다. 이전까지의 시위가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이었던 반면, 6월 2일 이후 전개된 6.3항쟁은 박정희 하야와 미국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본교 학생운동 탄압하려 대학공안사건 조작
본교는 학생운동에 대한 '색깔 논쟁'의 최초 희생자가 됐다. 유신정권은 1973년 본교를 대상으로 대학공안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이념써클인 한맥회(NH회) 학생들을 북과 내통한 혐의로 구속한 ‘NH회 그룹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민우(民友)>지 사건)’과 한국민족사상연구회 학생들을 내란음모죄로 구속한 ‘검은 10월단 사건(<야생화>지 사건)’이 그것이다. 고려대를 표적으로 설정해 전 대학 학생운동권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고, 국민들에게 학생운동 세력은 곧 북과 내통하는 불순분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공안 차원에서 날조한 사건이었다.

본교 휴교 위해 긴급조치 발포
1975년엔 유신체제에 항거한 고려대 학생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긴급조치 7호가 발포됐다. 3월 말부터 시작된 대학생들의 반유신투쟁은 4월 초 전국 대학으로 번져갔다. 4월 1일 총학생회는 긴급대의원총회를 소집해 향후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시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총학생회 간부 등을 연행해 억류했고, 본교의 시위는 지도부 공백사태에 처한다. 그럼에도 비상총학생회를 구성해 4월 7일 ‘△민주 헌정의 즉각 회복 △<민우>지, <야생화>지 관련 학생 즉각 석방 △인권유린 행위 중지’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어 8일에도 2천여 명의 본교생이 참여해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사상 초유로 단일 대학을 대상으로 발동된 긴급조치 7호의 이유가 됐다. 긴급조치 7호 발포 이후, 고려대에는 휴교령과 함께 군대가 진주했으며 △학생 △교수 △교직원의 출입이 통제됐다. 당시 김상협 총장은 휴교 사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1980년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의도가 노골화되자 본교는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반대한 대규모 군중집회를 이끌었다.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즉각적인 전면적 반독재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으나 당시 학생운동 공개 지도부였던 각 대학 학생회장단은 전면적 투쟁을 보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고 나선 것이 고려대 학생운동이었다. 복학생 중심의 모임이 주도해 석탑축전 전야제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5월 2일부터 시위에 돌입했고 총학생회장이 축제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본격적인 농성 시위가 시작됐다. 5월 5일 개교 75주년 기념식도 농성학생들과 함께 거행했으며 총학생회장 신계륜은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까지 싸울 것을 명시한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

1980년의 학생운동은 학원민주화 요구에서 시작해 전면적인 사회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정치투쟁으로 전환됐는데 본교 학생운동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결국 서울 지역 총학생회장단도 가두투쟁에 나서기로 결정했으며,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인 교내집회를 주장하던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들도 가두시위에 가담해 5월 15일 서울역 앞에서 학생과 시민 20만여 명이 모였다. ‘계엄 해제’와 ‘조기 개헌’을 요구한 이 집회는 4.19 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에 이은 대규모 군중집회였다. 같은 해 10월엔 전두환 세력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이는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한 최초의 학생시위였다.

이후 1980년대의 전반적인 학생운동은 학교별로 이뤄지던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타 대학이나 재야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정치투쟁을 전개하면서 사회변혁이라는 학생운동의 목표를 추구했다. 본교도 이런 흐름에 따라 1985년 전국학생총연합 부의장, 1987년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기 의장을 배출했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를 집필한 정태헌(문과대 한국사학과)교수는 “우리 고대생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민족적 요구에 부응해 대학생으로서 해야 할 행동을 해왔다”며 “고려대의 학생운동사를 돌아보는 일은 본교의 역사적 자리매김과 더불어 미래를 위한 과제 설정에 있어서도 대단히 뜻 깊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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