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근하고 유머감각 있는 앵커, 무슨 말이든 잘 들어주는 든든한 선배’

박영환 앵커와 함께 일하는 스텝들이 평가하는 그의 모습이다. 왠지 냉철할 것 같은 TV 속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주위평가다. 그렇다면 그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지난 14일(목) KBS 뉴스9의 박영환 앵커를 만났다.

“40년 넘게 뉴스를 진행한 미국 CBS 앵커 댄 래더나, 현재 MBN에서 40년 넘게 자신만의 토크쇼를 진행해온 래리 킹 같은 방송경험이 많은 경륜 있는 앵커가 되고 싶습니다”

기자였던 그가 앵커가 된 것은 지난 2004년. 그 뒤 KBS 1TV 뉴스라인 앵커에 선발돼 사건 현장을 떠나 5년간 뉴스라인 스튜디오를 지켰다. 하지만 뉴스라인을 통해 쌓은 앵커경력과 12년의 기자경력을 가진 그에게도 메인뉴스인 9시 뉴스 앵커는 어려운 도전이었다. 그는 지난 11월 KBS 뉴스9 앵커로 최종 선발된 순간을 떠올리며 “감사하게도 또 하나의 꿈을 이뤘다”고 말한다.

1991년에 KBS 방송기자로 입사한 박영환 앵커는 12년동안 기자생활을 했다. 항상 기사가 따라다녔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그에겐 취재운이 따랐다. 1997년 ‘괌 KAL기 추락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영환 앵커는 마침 가족들과 휴가차 괌에 머물고 있었다. “갑자기 보도국 차장에게 ‘KAL기가 괌에 추락했는데 5분 후에 생방송 들어가니까 준비하라’고 전화가 왔어요. 방송국에서도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것 외에는 모르는 상황이어서 같이 간 가족들을 취재진으로 긴급 편성했죠. 부랴부랴 △사고원인 △희생자처리 △구조상황 등을 각자 분담해 자료조사를 하고 정보를 모았어요. 그리고는 18시간동안 전화로 방송을 했죠. 그 때의 취재로 보도상을 받게 됐어요. 물론 덕분에 가족들은 휴가를 완전히 망쳐버렸죠”

취재운이 따랐던 만큼 성과도 컸다. 그는 사회부와 정치부, 특집뉴스팀 등에서 활동하는 동안 특종상을 8번 받았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1994년 겨울에 독도에서 보낸 14일간의 취재다. 당시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공해상에서 함정과 해상보안청 항공기를 동원해 무력시위를 했다. 사회부 기자였던 그는 민감해진 한일관계를 보도하기 위해 독도의 동도경비대 막사 뒤쪽 창고에서 이중천막을 치고 스티로폼을 깔고 지내면서 보도를 했다. “취재를 마치고 독도를 떠날 때 경비병들이 우리 헬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난간 계단에 서서 손을 흔들어줘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때는 독도가 내 몸의 일부로 와 닿으면서 눈물이 났죠”

그가 기자를 꿈꾸기 시작한 것은 고교시절부터였다. 맨 뒷장에 ‘미래의 00일보 기자 박영환’이라고 적어둔 고2 자습서는 아직도 그의 책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기자의 꿈은 대학시절에도 이어졌다. 본교 새내기였던 1985년부터 고대방송국(KUBS)에서 기자와 앵커활동을 했고 국장까지 지냈다. 그에겐 방송국 활동에 매진하면서도 단 하루도 빼놓지 않던 습관이 있다. 바로 신문읽기. 특히 칼럼은 오려서 가지고 다닐 만큼 반복해 읽었다. “격주로 연재되던 동아일보의 김종배 씨와 최일남씨 칼럼을 빼먹지 않고 꼭 챙겨봤어요. 칼럼이 나오면 손바닥만 하게 축소복사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 읽곤 했어요. 그러다보면 일주일에 50번 정도는 무난하게 읽게 됐죠. 그렇게 반복해 읽다보면 그 칼럼의 문장, 글의 구조가 모두 오롯이 내 것이 되더라고요” 그가 그렇게 4년간 꾸준히 읽은 칼럼은 라면 4박스 분량이나 된다.

그는 언론사를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꼭 신문을 이용하라고 말한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칼럼을 선택해서 꾸준히 많이 읽으세요. 그 다음엔 자신이 좋아하는 칼럼니스트의 글을 모방해서 써보세요. 그 칼럼니스트의 글에서 뼈대를 가져와서 내 식으로 살을 붙여 써보는 거죠. 그 다음은 일간지나 주간지 등에 독자투고를 해보는 거예요. 보통 독자투고는 200자 원고지 3~4매정도 분량인데, 생각보다 쓰기가 쉽지 않아요. 처음엔 잘 선정이 되지 않겠지만 자꾸 쓰다보면 글 실력이 늘어서 실리기 시작할 거예요. 자신이 쓴 글이 실리기 시작하면 자부심과 함께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자연스레 생기게 될 겁니다”
그에게 앵커와 기자는 무엇이 다른지 물었다. “기자는 현장을 직접 간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죠. 하지만 자신의 취재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시야가 좁을 수 있어요. 그에 비해 앵커는 모든 기자들이 취재해오는 전체적인 뉴스를 본다는 점에서 넓은 시야를 가지죠. 하지만 보도국에 앉아서 현장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어요”

방송국 생활 18년. 긴 시간 몸담은 만큼 언론인의 자리를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을까. “언론인으로 살게 된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사회가 진화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단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하고 있죠” 그는 언론인이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소양으로 ‘균형’을 꼽는다. “기자에겐 세상을 보는 균형잡힌 눈과 사고, 평상심, 그리고 모두를 포용하는 가치관이 가장 중요해요. 또한 기존의 것을 회의하고 현상에 대해 계속적인 의구심을 가지는 자세도 필요하죠. 언론인은 모든 현상의 중간자로서 현상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박영환 앵커는 대학생들에게 ‘모든 일을 즐기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따라 잡을 수 없어요. ‘남들이 보기에 멋져 보이니까, 부모가 하라고 하니까, 안정적이니까’ 이런 거 말고,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길 바라요.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즐기며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거죠.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 조심스러워요. 지금의 실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대학과 달리 사회에서의 실수는 단번에 무능과 연결돼요. 미리 실수를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아요. 그래서 대학생일 때 많이 도전하고 많이 깨져보길 권하고 싶어요”

고교시절부터 꿈꿨던 기자의 꿈, 고대방송국에서 뉴스를 진행하면서 키웠던 앵커의 꿈. 그는 현재 두 가지 꿈을 모두 이뤘지만 끝은 아니다. 그의 현재 꿈은 다시 기자로 돌아가 눈을 감는 순간에도 취재현장에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기자로서 현장을 찾아가고 싶어요. 앵커의 눈과 기자의 취재정신을 가지고 다시 현장을 뛰고 싶거든요”

인터뷰가 끝나고 박영환 앵커는 프로다운 진지한 모습으로 곧 진행될 9시 뉴스의 멘트를 꼼꼼히 체크하고 외웠다. 몇 년 후, 간판앵커를 지나 다시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사를 전해줄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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