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

영화 속 여주인공 현정(문소리 분)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 여성이다. 어느 날 대학교 새내기 시절부터 7년간 사귀어오던 남자친구(이선균 분)가 뜬금없이 이별을 통보한다. 그녀는 다른 남자(김태우 분)와 결혼을 하지만 결혼 후 삶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 지겹고 험난한 일상의 반복이다. 남편과의 불화는 계속되고, 헤어진 남자친구가 다시 찾아와 마음을 흔든다.

영화의 제목인 ‘사과’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극 중 여주인공이 전 남자친구와 남편에게 하는 사과(Apologize)와 결혼 후 문득 자신을 찾아온 전 남자친구에게 건네는 사과(Apple)를 의미한다. 20대 후반 남녀의 일상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사과’의 감독 강이관(사회학과 91학번) 씨를 만났다.

강이관 씨는 잘 알려진 영화감독은 아니다. 그가 만든 장편영화는 ‘사과’ 하나뿐이다. ‘사과’는 그가 열정을 담아 만든 첫 장편영화였고, 해외 영화제에서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선 최고의 신예 감독에게 수여하는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선 몽블랑 신인 시나리오작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 강승리 기자)
그러나 정작 국내에선 영화제작이 끝난 지 근 4년이 흐른 지난해 10월에서야 개봉했다. 제작사와 배급사 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개봉이 미뤄지길 번복한 탓이었다. 강 감독은 개봉을 기다리면서 내심 속상했다고 한다. “어린아이도 그림을 그리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보여줘 칭찬받고 싶어하잖아요.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데 아무도 보질 않아 애만 태우는 기분이었어요”

영화를 구상한 계기에 대해 묻자 그는 중학교 시절 친구들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적엔 친구들과 어떻게 하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얘길 주로 했어요. 그런데 성인이 되니 다들 이미 결혼하거나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에서 좀 더 관계를 잘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그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20대 후반의 성숙한 남녀가 사랑을 지속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로 결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했지만 흥행엔 실패했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을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영화가 실패한 이유를 아직도 고심하고 있다. “나름대로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실패해서 충격이 컸습니다. 일단 영화 제작과 개봉 사이에 공백이 너무 컸어요. 4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정서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게 실패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제 내공이 부족한 탓이죠”
그는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커플 50여 쌍을 인터뷰하며 평범한 사랑의 전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인터뷰에서 수집한 문화적 배경이 다른 서울 여성과 경상도 남자가 결혼했을 때 겪는 갈등, 대학 캠퍼스 커플이 졸업 후 각자 다른 진로를 택한 후 겪는 갈등, 결혼 전후 달라지는 남녀의 모습 등의 사례를 영화 속에 직접 투영했다.

그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운 건 고등학교 2학년부터였다. 학창시절에 영화를 즐겨봤는데, ‘난 이것보단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1명씩 앞에 나와 장래희망을 말할 기회가 있었어요. 제 순서가 되자 문득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가슴 속으로 막연히 품고만 있던 꿈을 일단 말로 표현하고 난 순간부터 ‘영화감독’은 삶의 목표가 됐다.

그는 본교 입학 후 영화제작동아리 ‘돌빛’에서 활동했다.

당시엔 영화 관련 자료가 풍족하지 않아 선배들이 원서를 공부해 후배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배운
(사진 = 강승리 기자)
영화지식들이 지금까지 영화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는 재학시절 대부분을 당시 홍보관에 있었던 동아리방에서 보냈다. “동아리방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수업은 중간에 짬날 때에 들어갔죠” 영화 ‘사과’ 속에 등장하는 본교 서관 건물과 홍보관 앞 편의점 장면 촬영 땐 돌빛 후배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한예종 사태 때 ‘영화인 100인 서명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학은 개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을 보장하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한다”며 “사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서명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다음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다. “‘사과’는 철저히 여주인공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영화였고, 이번엔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사과’가 조금 외롭고 쓸쓸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다음 영화는 좀 더 발랄한 분위기로 촬영할 거에요.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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