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달 창간기념호에 실릴 축사를 받아야 했다. 아는 분께 추천을 받아 글을 잘 쓰기로 소문난 국문과의 한 교수님께 축사를 부탁드렸지만 ‘미안하지만 요즘은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란 이유로 거절당했다. 조교 분께 전해들은 말이었음에도 뭔가 중후하면서도 익살스런 분위기가 확 와 닿았다. 시간을 ‘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시적이었다. 이런 식의 매력적인 거절을 몇 번 더 받은 끝에 허락을 얻을 수 있었다.

어렵사리 받은 축사엔 교수님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안쪽에 사연이 적힌 띠종이로 고대신문을 묶어 다른 대학에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보내며 사랑을 전하던 이야기였다. 그 분은 당시 신문에 적혀 있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두 사람 사이를 오고 가던 신문이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고 했다. 사회가 더 따뜻해지는 데 어떤 방식으로든, 조금이라도 기여했기 때문이란 말이었다.

 

2.

 

▲ 바쁜 기자의 뒷모습 (사진=신정민 기자)
어떤 사람들이 직접 부대끼며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관계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건 아니면 짜증만 나건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 어느 쪽이든 제3자를 통해 말하고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말하고 들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음에도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우리와 대통령은 서로 만나 얘기하진 않지만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니 요즘은 오히려 이런 유(類)의 관계가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서로 직접 소통할 수 없는 이들 사이에서 신문이나 방송은 대신 말하고, 대신 들어준다. 때문에 이런 관계의 좋고 나쁨은 언론의 책임이다.


3.

한 학기동안 신문사에서 일하며 사람들하고 사이가 좋아지는 기사와 나빠지는 기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문 앞 재개발이나 폐지 사태 같은 ‘갈등’ 유형의 일들은 취재하면서 사이가 틀어진다. 이들 사안을 몇 번 취재할 일이 있었는데, 조금만 얘기를 나눠 봐도 한숨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기사를 써야하니 두 쪽 다 이해해야 했다.
취재가 끝날 때 쯤  “저쪽은 이러이러해서 그러는 건데 좀 이해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보곤 하는데, '그래도 저쪽에서 그러면 안 되지’나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의 대답만 돌아온다. 때로는 ‘그딴 식으로 얘기할 거면 하지 말라’는 식의 극단적인 말도 듣는다. 취재할 때는 별 문제가 없어도 그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지 않으면 아무 관계 없는 다른 면의 한 기사를 보고 ‘저딴 기사나 실을 거면서 우리 얘긴 왜 실어주지 않느냐’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렇게 원망을 들을 때면 모든 사람이 적이 돼 가는 느낌이다. 서로에게 서로를 이해시키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상대편의 입장에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게 원망을 사는 것 같다. 말리는 며느리가 더 밉다고.

반면 인터뷰나 단순 보도기사처럼 ‘갈등’ 유가 아닌 기사는 취재를 하며 사람들과 친해진다. 특히 인터뷰는 사람이 친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처음엔 살짝 어색하지만 오 분 정도 지나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얘기하게 된다. 그 사람도 나도 정해진 시간에 최대한 많은 말을 하고 들어야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것도 많다. 동년배든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이든 얘기를 하다보면 배울 점을 계속 찾아내게 된다. 감동 받은 적도 많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게 정말 신이 난다.

 

4.

 

▲ 바쁜 기자의 뒷모습2 (사진=신정민 기자)
국장님이나 부장님께 가장 크게 혼날 때는(기사를 늦게 내거나 밥 주문을 깜빡했을 때를 제외하고) 기사에 사건과 관계된 어느 한 쪽의 입장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다.

 

많은 사람들은 소위 ‘기자정신’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것이 언론의 참 역할이라고 말한다. 글쎄. 그것도 분명 한 역할이지만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의 사이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들어주고 말해주는 것을 온전하게 해내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그리고 정말이지 이건 벅차다.

게다가 솔직히 내 입장에선 그 이상의 판단은 내릴 수도 없다. 뭐가 더 옳은 건지 판단하기엔 경험도 지식도 부족하고 한 쪽을 향한 강한 신념도 없다. 취재를 하며 ‘이 사람이 뭘 숨기고 있구나’라든지 ‘이 사람, 그냥 귀찮은 거고 별 생각이 없네’라는 느낌은 종종 받지만, 대개 그것은 한 쪽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양쪽 모두에 해당되기 때문에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는 좀 그렇다. 굳이 신념 같은 게 있다면 양쪽 사람들을 온전히 대신하면 무언가 바뀔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전부다.

어쩌면 이렇게 중립을 지키려고만 하기에 고대신문을 한 쪽에선 ‘관변신문’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선 ‘약자라도 편애하면 안 되지’라는 말을 듣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건의 조회 수라도 늘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중 신문과는 달리 폐간될 걱정이 적은 학보사이기 때문에 이 점에선 많이 자유롭다. 자극적인 내용을 다뤄 시선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맹맹하게 중립을 지킬 수 있는 것도 같다. 그리고 난 맹맹한 게 좋으니 여기서 계속 일해야 겠다.

다만 문장이라든지 기본적인 ‘질’은 열렬하게 지켜야 하는 것 같다. 취재를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느끼는 귀찮음이나 두려움, 말도 되지 않는 문장들- 이런 걸 어떻게든 버리려 애써야 하는데, 부끄럽지만 아직 한참 부족해서 좀 더 노력하려 하고 있다. 되도록 기사를 빨리 쓰려 하고, 마지막에 판(版)을 확인하려 하고, 취재할 때 떨지 않으려고 하고, 화내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앞으로 1년을 더 하면 적어도 한 번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띠종이로 묶어 보내’기에 부끄럽지 않은 신문을 만드는 데 낄 수 있지 않을까.
이것도 막연한 믿음일 뿐이지만, 사는 게 늘 마지막에는 막연한 믿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또 막연하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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