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축구부 서동원(체교 92)코치. 노정윤, 이임생, 이기형 등과 함께 90년대 초 우리학교 축구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핵심인물이다. 우리학교에 입학하기 전 중동고등학교 3학년 이던 1991년, 역사적인 세계청소년대회 남북단일팀에 유일한 고등학생신분으로 선발되어 아무나 하지 못했던 소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 이집트에서 들려온 U-20월드컵 8강 소식에 20여 년 전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남한과 북한의 단일팀 구성

1991년, 따뜻한 통일의 바람을 타고 ‘단일팀’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되었다. 개인종목 탁구에서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거둔 후로 단체종목인 축구에서도 단일팀이 결성되었다. 선수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 경기를 잘 풀어나갈 수 있는 단체종목의 특성 때문에 개인종목 단일팀보다 더 많은 관심과 기대가 축구단일팀에 쏟아졌다.


국빈대접-인생에서 ‘축구인’ 으로서 가장 황송한 대접을 받았던 그 때

당시 포르투갈에서 열린 1991년 세계청소년대회에 대비하기 위해 남한에서 보름, 북한에서 열흘간의 합동훈련이 진행되었다. 남한과 북한 양국에서는 최고의 호텔을 제공하고 등 모든 면에서 최상의 대접을 하였다. 서울에서 훈련을 할 때였다. 명동으로 단체 쇼핑을 가게 되었다. 호텔에서 명동으로 가는 버스가 단 한 번도 신호에 걸리지 않게끔 신호체계를 바꾸어 주었다. 목적지는 당시 남북단일팀을 후원하던 의류사의 매장이었는데 개인이 원하는 만큼 마음에 드는 옷들을 모두 가져갈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역시 최고급 대우를 받았다. 거의 매일 저녁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음식들과 백두산 사슴고기, 묘향산 노루고기와 같은 보양식들을 제공했다. 뱀술, 산삼과 같이 귀한 것들도 아낌없이 제공하였다. “매일 차려지는 보양식과 귀한 음식들이 신기해서 하루는 북한 접대원(웨이터)에게 ‘이게 다 진짜가 맞느냐’고 묻기도 했지. 그러면, 그 사람들은 정색을 하면서 그랬어. ‘이게 다 진짜가 맞다’며 ‘설마 우리가 당신들에게 가짜를 내놓겠냐’’며 기분 나쁜 말투로 대답하기도 했어.” 꿈 같은 대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북한에서 포르투갈로 이동하는 왕복 교통편으로 북한에서 제공한 전용민항기를 이용했다. 일반 항공편을 이용했다면 몇 번의 환승을 거쳐 힘들게 갔을 머나먼 거리를 전용민항기 덕택에 편히 오고 갈 수 있었다.


남한은 수비전담, 북한은 공격전담?

그 당시에는 암묵적으로 남한은 수비를 전담하고 북한은 공격을 전담한다는 룰이 있었다. 서 코치에게 이런 말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그 때의 대표팀에 남한은 수비수들이 많았고 북한은 공격수들이 많았다”고 한다. 남한에는 훌륭한 수비수들이 많았고 북한에는 훌륭한 공격수들이 많아 나름대로 베스트 멤버를 구성하기 위해 선수들을 뽑다 보니 그런 말이 생겨난 것. 당시 공격수로 팀에 뽑혔던 서 코치의 실력이 남달랐음을 이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국내에서 훈련할 때에는 남한의 국정원 직원들과 북한의 경호원들이 남북 선수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같은 방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의 방을 오가는 것조차 자유로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포르투갈 현지에 가서는 감시하는 인원이 많이 줄어 북한 선수들과 더욱 자유롭고 편하게 왕래할 수 있었다. 현지의 관광지를 구경할 때에도 북한 선수들과 함께 나가 쇼핑을 하기도 했다. 서 코치는 포르투갈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북한 친구들은 청바지를 그렇게 좋아했어. 우리는 명품가방과 신발을 사기에 바빴는데 북한 선수들은 시장에 파는 보세청바지를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본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들 것까지 모두 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그 당시 북한 내부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아 선수들이 가진 돈도 얼마 없었을 거야. 남한 선수들이 북한 선수들이 필요한 걸 사주기도 하고 그랬어”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북한 선수들과의 오랜 합숙을 통해 느낀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감 하에 강호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아일랜드와 비기며 8강에 진출했으나 아쉽게 홈팀 포르투갈에 0대 1로 패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경기력에서는 결코 포르투갈에 뒤지지 않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것이 서 코치의 평가다. 당시 포르투갈의 멤버는 이른바 ‘골든 제네레이션’이라 불리며 포르투갈의 황금 세대를 이끈 루이 코스타, 루이스 피구, 후안 핀투 등이 있었다.


눈물의 판문점

두 달을 매일 같이 함께 한 남북선수들도 대회가 끝난 후 이별을 맞이하게 됐다. 북에서 보내준 전용민항기를 타고 평양으로 귀국해 판문점에서 해단식을 가졌다. 고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와 여린 마음에 북한 선수들과의 이별이 매우 슬펐단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남과 북의 어린 선수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서 코치는 “남북단일팀에서의 경험들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준 계기였다”며 북한과의 가슴 뭉클한 동포애를 느꼈다고 밝혔다.


기억에 남는 선수 - 공격수 윤철

당시 단일팀의 유일한 고등학생이었던 서 코치는 팀의 막내이기도 했다. 형들이 막내인 서 코치에게 심부름도 많이 시켰지만 그만큼 많이 챙겨주고 신경 써 준 것도 사실. 북한선수들 중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윤철 선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서 코치는 “공격수였던 윤철 선수가 제일 기억에 남아. 붙박이 주전은 못했지만 나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공격수 최철보다는 훨씬 잘했던 것 같아. 합숙 내내 형들 뒷바라지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윤철 선배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어”라며 그 때 느꼈던 따뜻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아직 북한과 통일이 되지 않아 그 때 만났던 선수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보기는커녕 지금 살아있긴 한지 살아있다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당시 북한 측 코치였던 문기남(현 울산대 감독) 코치만이 2003년 가족과 탈북하여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뿐이다. 대학대회에서 가끔 만나면 꼭 따로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고. “두 달동안 매일을 함께 한 북한선수들이 가끔 생각나지. 지금 만날 수 있다면 그 때의 감흥에 대해 추억을 나누고 싶어. 크고 거창하게 무엇을 한다기 보단 안부를 나누고 일상을 얘기 하고 싶은데…”라며 말 끝을 흐렸다.


후배이자 제자 박희성에게

91년 세계청소년대회 8강에 진출했던 지난 날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홍명보 호에 승선해 20여 년 만에 8강 진출의 주역이 된 우리학교 새내기 공격수 박희성(체교 09)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희성이는 기술이 우수하고 활동량도 많고 포스트 플레이에도 강해. 체격적인 측면이나 스피드도 좋지만 득점에 대한 근성과 득점 실패 시 냉정함이 좀 부족한 것 같아. 경기에 대해 욕심도 별로 없는 편이고. 공격수라면 어느 정도 이기적인 부분도 있어야 욕심을 내서 공격을 할 수 있는데. 이번 대회에서도 자신이 넣을 수 있는 골을 김민우(연세대 09)선수에게 패스해 주더라구. 결국 민우가 넣긴 했지만 그건 자신이 직접 넣을 수도 있는 골이었는데 말이야.” 서 코치의 이런 걱정은 “대표팀 서정원(경영 88)코치와의 공조로 조금씩 고쳐질 것 같다”며 “지도자로서 선수의 단점을 발견하고 힘이 닿는 한 최대한 노력해 이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박희성 자신도 “이번 대회에서 자신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느끼고 왔다”고 서 코치에게 말했단다. “여기에서 주눅들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간다면 분명히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서 코치는 자랑스런 후배에 대해 큰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에피소드


#1

당시 북한의 호텔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객실에서 하는 이야기를 호텔 직원들이 모두 엿듣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남한 선수들은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들으라는 듯이 “베개가 너무 높아 목이 아프다”며 이곳저곳에 대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잠시 후 호텔 직원이 객실 문을 두드리며 방에 들어와 베개를 낮고 푹신한 것으로 바꾸어 주고 갔다는 것. 그 이후로 남한 선수들은 더욱 말조심을 하게 됐다고.

#2

우리선수들은 북한으로 가기 전 그 때의 안기부에 가서 여러가지 교육을 받았다. 절대 북한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걸어선 안 되고, 밤에도 나가선 안 된다는 등 주의 해야 할 점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두 나라간의 정치 사회적 체제가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에 대해서 말해선 안 된다는 것 역시 중요한 사항이었다. 북한에서 합숙을 하던 당시 선배 한 명이 남한으로 돌아가면 주변사람들에게 기념품으로 하나씩 주려고 북한 선수에게 노동당 배지를 구해달라고 했단다. 이 사실을 들킨 선배는 안기부 직원들한테 무척이나 혼났다는 후문.

#3

남북 선수들은 훈련만 같이 하고 그 외의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했거나 아예 허락되지 않았다. 숙소도 서로 다른 층을 쓰고 층마다 경호원들이 지켜 왕래를 철저히 막았다. 방을 같이 쓰는 것은 당연히 허락될 수 없었던 일. 지나가면서 우연히 북한 선수들의 방을 보았는데 TV를 보다가 허겁지겁 끄는 모습이 보였단다. 북한 선수들도 정부로부터 남한에 가서 하지 않아야 할 지침들에 대해 미리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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