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회 전국역사학대회가 ‘식민주의와 식민책임’이란 주제로 지난 28일(금)과 29일(토) 고려대에서 열렸다. 28일엔 공동주제 발표가 진행됐다. 최광식 전국역사학대회장은 “과거사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일간 우호적 관계를 만들기 어렵다”며 “잘못된 것은 부각시켜 털고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전국역사학대회조직위원장은 “이제까지 전국역사학대회 중 가장 많은 발표가 진행된다”며 “사상 최대 규모의 역사학 축제”라고 대회를 설명했다. 이번 대회는 지난해의 역사학계 분열을 치유한다는 의미도 있다. 작년엔 역사학회의 독단적 운영을 이유로 한국사연구회와 한국역사연구회가 불참했었다.

눈사람 모양의 조선사회

박찬승(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조선의 이중사회화’란 주제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최근의 식민지근대성론이 ‘식민성’보다는 ‘근대성’에 관심을 가져 식민지 조선사회의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특징 중 하나로 ‘이중사회화’를 들었다. 조선사회가 다수의 일본인, 소수의 조선인으로 형성된 상층부와 소수의 일본인, 다수의 조선인으로 구성된 하층부로 나뉘어 눈사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서구 식민지의 경우 본국 사람이 식민지로 많이 이주하지 않아 조선에 왔던 일본인들처럼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진 않았다”며 “대만에서도 거주구획 등에서 조선과 비슷하게 나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토론을 맡은 김희곤(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이중사회화의 ‘이중’이란 말이 어색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삶이 여러 층의 사람이 모인 집합일 때 ‘이중’이란 말 보단 ‘이원적’이란 말이 더 설득력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이원화가 더 적절하다는 지적에 동의하며 “사회적 측면의 이원화를 다룬 것이고, ‘dual society’란 의미에서 ‘이중사회’란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이중사회론이 상층·하층 사이 중층이 결여된 양극화를 뜻하는지 물었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농촌에선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도시에선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져 중산층 조선인이 존재하기 힘들었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식민지에서 중간층이 형성되기 어렵다고 생각해 이중사회론을 제시한 것”이라며 “결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려 했던 것은 민족적·계급적 지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민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의도”라고 말했다.

“한일병합조약은 무효”

‘일제의 한반도 지배와 법’이란 주제로 김창록(경북대 법학과) 교수가 발표했다. 김 교수는 법에 따라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1910년 한일조약’을 포함해 1900년대 한일조약과 1965년 한일조약의 의미를 살펴봤다.

김 교수는 먼저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내의 “1910년 8월 22일과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already null and void(국어와 일본어의 해석 차이 때문에 영어를 사용)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에 대한 한·일의 입장차를 소개했다. 일본은 이 조항을 1910년 당시엔 조약이 유효했으나 1965년에 무효가 됐다는 의미로 파악했다. 한국은 1910년 조약이 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체결됐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효라고 해석했다.

박 교수는 이 조약에 대해 ‘강박은 있었지만 법은 애매하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의 국제 관습법을 살펴보면 ‘국가에 대한 강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유효’란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강박에 의한 조약 중 대표적인 ‘강화조약’이 전쟁을 더 인도적으로 끝내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대원칙엔 합의했지만 1910년 조약에 대해선 이견이 생긴다고 말한다. ‘국가에 대한 강박’의 범위와 목적설정 때문이다.

토론을 맡은 심희기(연세대 법학과) 교수는 ‘역사적 사실’과 ‘그 시절의 국제법’은 무엇인지 지적했다. 국내에선 ‘조약이 무효다’, ‘강박을 했다’는 주장을 할 때 그 논증의 양과 질이 대단히 허약하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다보하시 기요시의 저술은 1133쪽에 달한다”며 “한국 학계는 이 정도의 치밀한 고증을 거친 저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고종이 일본에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이 저항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헐버트(Hulbert)에게 편지를 보내서 무효 선언을 했다는데 단순히 편지를 보낸 것이 선언인지, 국제회의에 칙사를 보내도 모자를 시기에 밀사를 보낸 게 과연 저항이 맞냐는 것이다. 김 교수는 사실관계가 틀렸다고 지적하며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미 정부에 전달하려 한 것이고, 대한민국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만국평화회의에 칙사를 보낼 수 없어 밀사를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 문제를 판단할 법정이 없고, 한국 정부가 일본에 요구할 것 같지도 않다”며 “한·일 사이에 이런 논의를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 나갈지 생각할 수 있다”고 연구의 의미를 설명했다.

종합토론 - ‘주권국가’와 경제사학

정태헌(문과대 사학과) 교수가 토론의 문을 열었다. 정 교수는 과거사를 성찰해야 21세기를 열 수 있다고 전제하며 ‘주권국가’란 열쇳말을 던졌다. 정 교수는 “어미새(국가)가 둥지를 틀고 품어줘야 새끼(자본주의)가 잘 클 수 있다”며 주권국가가 있어야 경제도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해방 후 경제상태가 ‘한일합방’ 이전보다 후퇴한 것은 ‘주권국가’가 없는 식민지자본주의의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생산력이 발전한 뒤 민주화가 성취된다는 유물론적인 주장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조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낙년(동국대 경제학) 교수가 정태헌 교수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 주권국가가 없다는 건 ‘식민지’라는 뜻인데 식민지 상태에서도 경제성장은 이뤄졌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력의 증대 이후 민주화가 이뤄진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조응한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서구의 시민혁명은 자유주의에 가까운데, 그것이 경제성장을 낳았다”며 “빈부격차 같은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려 민주화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박찬승 교수는 김낙년 교수의 주장을 비판했다. 일제강점기의 경제성장을 말할 때 GDP와 1인당 평균소득을 말하는데 그 속에서 일본인·조선인의 구별은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일본인·조선인의 삶이 실제로 어땠는지 밝히는 게 중요하다”며 “GDP가 성장했다는 건 사회상을 밝히기 보단 단지 수치놀음일 뿐”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마지막으로 경제사학자가 ‘식민지 지배’란 성격을 빼고 연구한다고 지적하며 식민지자본주의에서 경제가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움직였는지 밝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종합토론 - 아직 남은 식민주의

마지막 순서에선 현재 식민주의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얼마나 청산됐는지를 토론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법’ 토론을 맡은 심희기(연세대 법학과) 교수는 법 영역에 남아 있는 식민주의를 말했다. 심 교수는 한국 법조인이 법 이슈를 결정할 때 주로 일본 사례와 독일 사례를 찾는 현상을 지적했다. 한국 민법이 일본 민법을 많이 따르고, 일본은 독일의 법을 많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 교수는 “법이 일본에 종속된 면이 많다는 점을 보여주는 예”라고 말했다.

교육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배, 유산, 책임과 역사교육’의 토론을 맡은 김한종(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교육현장에서 드러난 식민 잔재를 언급했다. 김 교수는 “학교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수업종소리, 수업시작인사 같은 것이 사실은 메이지 시대에 정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며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교육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도 같은 문제”라고 말했다.

박진동(교육과정평가원) 연구위원은 역사를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3분하는 방식이 식민주의의 잔재라고 지적했다. 일제강점기에 쓰이던 역사 분류가 현재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최근에 등장한 ‘동아시아사(史)’란 과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국사를 가르쳐도 결국 그 내용은 한반도 안에 갇혀있다”며 “동아시아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일본사 전개 면에서 살펴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함동주(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국내 일제강점기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함 교수는 “국내 연구에선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지배했고, 그 성격이 무엇인지에만 초점이 맞춰있다”며 “식민지배가 ‘어떻게 이뤄졌는지’가 아니라 식민당국이 어떤 문제에 부딪쳤고, 어떤 정책을 폈는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함 교수는 “일본에서도 제국주의보다는 제국의 구조를 살펴보는 연구가 많이 이뤄진다”며 “식민지와 제국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라 생각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지배 방식이 어떻게, 왜 달라졌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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