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신문이 지난호(1645호)에서 안암캠퍼스 학생이 세종캠퍼스 학생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1면 머릿기사로 다뤘다. 고대신문답지 않은 미성숙한 보도도 아쉬웠지만 입학성적이란 잣대 하나에 매몰된 안암 학생의 편견이 더 아쉬웠다.

고대 내부의 캠퍼스 간 자원배분의 편향성과 고질화된 심리적 편견, 그리고 그것들이 야기한 상처들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는 말인가.

대학공동체가 하나의 단위로서 일체감을 느끼는데 입학성적이 그렇게 중요한가. 같은 캠퍼스 안의 단과대나 학과, 다른 대학들 간에도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입학성적에 따른 우월감이 공동체의식의 형성에 주된 근거라면, 그것은 자가당착의 유치한 엘리트주의이다. 내가 속한 학과, 캠퍼스, 대학에 따라부지런히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왕래한다면 얼마나 처량하고 비루한가. 그러는 사이 소속에 대한 긍지나 공동체의식은 실종되고 나의 정체성조차 끊임없이 흔들리는 레이더 형(radar-type)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다시 끄집어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린 이미 과도하게 입시나 학력 위주로 서열화 된 이 땅의 대학들과 그것을 조장해 온 사회 그리고 학력위주의 보상체계를 확대재생산하는 철옹성 같은 기득권 구조에 식상함을 느끼고 있다. 우린 대학이 더 이상 사회적 상향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빈부의 대물림을 초래하는 난공불락의 도구로 변질되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체제가 요구하는 바에 순응하여 마침내 원하던 대학 입학이라는 성취를 따낸 수많은 엄친아들과 딸들의 자부심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성취란 것은 모두 사회적 산물이다. 우리의 개인적 성취를 사회적으로 소비하여 작게는 자기가 속한 대학과 넓게는 한국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시켜야 마땅한 일이다. 지난 6.2지방선거 결과가 이 땅의 젊은 지성을 열광시킨 이유가 무엇이며, 진보적 교육인사를 대거 당선시킨 이 땅의 젊은이를 나 같은 기성세대가 뜨거운 박수로 환호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지난 호 <고대신문> 보도의 방향은 이미 존재하는 캠퍼스간 벽을 허물기 위해 학교와 학생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에 닿아 있어야 했다. 설문조사의 자료는 그런 목적을 위해 조심스럽고도 은밀하게 활용했어야 옳았다.

안암 학생처럼 세종 학생도 이미 고려대라는 이름의 학교를 선택하여 입학한 고대생이다. 그것이 전부다. 이 당연하고도 엄연한 사실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런 보도는 고려대생의 긍지가 겨우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주된 변수로 작용하는 입학 당시의 학력에서 주로 기인한 것이라는 부끄럽고 불편한 실상을 드러낼 뿐이다.

약자를 도려내자는 것은 공동체주의의 타락한 버전이다. 가능한모든 조건에서 대등한 관계로 구성원들을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주의이다.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사회적 편견을 과감하게 떨쳐 내는 일, 그 일에 실패하면, 우린 어느새 강자에 비굴하며 약자에 오만한 삶을 사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 지성은 늙고 남루하다.

공공행정학부 고세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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