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내 생일, 11월 21일 밤. 휴대폰이 울리며 고대신문 인턴기자 합격통지가 날아왔다. 생일 선물이라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두 학기(사실은 한 학기 조금 더)가 흘렀고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버텨온 나는 이제 시사부 정기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기자는 대통령보다 높지 않고 거지보다 낮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기자가 된 선배가 던져 준 말이다. '고대신문 수습기자'로 대통령부터 거지까지 모두를 취재원으로 만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고대신문 수습기자'는 학교를 다니면서 그 누구보다도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얻는다. 취재처와 맡은 사안에 따라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물론 총학생회장, 처장, 스포츠스타, 연예인, 학내 유명 인사를 직접 대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취재원을 깔봐도 안되고 취재원에게 쫄아도 안된다는 것!
내 취재처 안암총학 특성상 항상 학생 취재원만 만나다가 처음으로 교수님과 인터뷰를 하는 날이었다. 질문을 이것저것 준비해갔음에도 나는 연구실 앞에서부터 떨었다. 인터뷰 내내 버벅대며 했던 말을 또 하고 심지어 긴장해 질문 한두개를 빼먹기까지 했다. 후에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빼먹은 질문을 드렸다. 교수님께선 웃으면서 답해주셨는데, 아! 정말이지 창피하고 아찔한 인터뷰였다.
누구를 만나던 자세는 같아야 한다. 겸손하고, 당당하게.

不可近 不可遠(불가근 불가원)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다. 기자-취재원 사이는 내가 겪어본 어떤 인간관계보다 어렵다.
축제에 대한 기사였다. 너무 많은 주체가 얽혀있었다. 안암총학, 각 단과대 학생회, 동아리연합회, 애기능동아리연합회, 작년 축준위, 학생처… 너무너무 골치가 아팠다. 취재를 해도 어느 쪽이 정확한 정보인지 판단이 안 섰다. 조금만 불리한 질문을 던지면 '아직 결정이 안됐다', '들은 적 없다'고 말하는 취재원들 사이에서 나는 고민했다. 기사 하나로 안암총학이나 동연이나 각 단과대 회장들 등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과 대립각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맘대로 소설을 지어내기엔 내 이름 석 자 크레딧이 부끄러웠다.
결국 어떻게 하면 문제점을 '직접 다루지 않고', '논쟁을 피하면서'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초고를 냈다. 대부분 기사가 데스킹(빽)이 끝나는 토요일 0시, 나는 편집국장실에 불려가 호되게 혼이 났다. 처음부터 다시 쓰라는 말에 앞이 캄캄했다. 한 10분간 아무 생각 없이 멍했던 것 같다. 토요일 새벽 1시, 선배 기자의 도움으로 사실 확인부터 시작했다. 열린지 6개월도 더 된 중앙운영위원회 속기록을 찾아 읽고 이제까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퍼즐을 맞췄다. 토요일 새벽 4시 반이 넘어서야 기사는 몇 가지 추가취재를 남겨둔 채 OK가 떴다.
당연하게도 다음 날, 클레임 전화가 왔다. 취재점검을 갔을 때 누군가는 내게 섭섭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대신문에 임하는 자세는 이 기사를 전후로 바뀌었다. 취재원과 기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드디어 조금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기사는 나태함과 오만함을 깨달은 뼈아픈 기사이면서 내게 있어 가장 사랑스러운 기사다.

언제였더라, 아마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떨어지는 D-day 숫자에 쫓기는 우리가 크게 한숨을 쉴 때마다 선생님께선 본인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자면 단연코 학보사 이야기다. 선생님께선 학보사를 하며 기자의 꿈을 포기했다고 하셨지만 잉크 냄새를 말씀하실 때 그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쓸쓸하면서도 반짝반짝 빛나던 그 눈빛엔 청춘을 녹여 만든 신문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1학년 2학기, 모든 것이 시들해진 나는 모교에 다녀오는 길에 그 이야길 떠올리며 고대신문 지원을 결심했다. 아마 나도 선생님처럼 청춘을 녹여 뭔가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난 학기 고대신문에 내 청춘이 녹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걸 배웠다. 남은 한 학기도 힘차게 달리며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고 싶다. 훗날 나도 빛나는 눈으로 누군가에게 '고대신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수습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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