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듣기 싫어하고 이야기하기 무서워하는 사회에선 의견이 다를 여지와 대안이 설 자리가 없다. 이 불편한 삶을 둘러싼 불가항력을 분쇄하는 것 외엔 남은 수단이 없다면?
 알렉산더 해밀턴은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에서 “인간사회가 … 그들의 생각과 선택에 따라 훌륭한 정부를 세울 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인간이 그들의 정치체제를 위해 끝없이 우연과 무력에 의존해야 하는 운명을 선택할 것인지”를 물었다. 우리는 지금 중동의 대답을 듣고 있다. 튀니스와 카이로의 무너진 성전 위에 광장이 들어섰다. 리비아에선 쟁탈전이 벌어진다. 조심스런 예언과 대조적으로 해석이 꼬리를 문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권이 특정 사회세력을 일점사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견고한 성 하나를 갈라진 땅이 무너뜨렸다.
 이집트에선 부아지지 분신 이후 공공장소에서의 자살이 잇달았다. 세라 벤 네피사 개발연구원 통합분과 201 연구원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월호에서 “다른 식으로는 정권의 관심을 끌 방법이 없기 때문에 폭력에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무바라크 정권은 사는 게 힘들어 자살한 이들의 ‘비정치성’에 안도했으나 튀니지 혁명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껭은 〈자살론〉에서 “사회에의 종속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한다면 … 사회는 개인들이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고자 할 때 그들을 막을 힘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튀니지와 이집트 시민들은 삶의 고통에 인내심 있게 순응할 이유가 없었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치체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죽기 시작하며, 그 자체 속에 파멸의 원인을 품고 있다”면서 “좀 더 오랫동안이나 좀 더 짧은 기간 동안 생존하기에 알맞은 체질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체질은 무엇인가. 정치가 만든 ‘비정치적’ 문제 앞에 무력한 시민과 공약을 잊는 대통령이 팔·다리를 이룬다. 머리는 정부의 약속을 정권이 파기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등에 업고 억압과 배제를 일삼는 자들의 가면을 외면하진 않았나. 순응을 멈춰야 한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