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의 열기가 뜨거웠던 시절, 그때는 많은 것이 가변적이었다. 가난한 농군의 자식이 뛰어난 두뇌와 성실함으로 판사나 검사 혹은 대기업의 임원이 되어 타고난 가난을 극복하고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때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계층 이동을 할 수 있었던 가능성의 시대였다. 걸핏하면 ‘신화(神話)’로 포장되었던 그 시절의 ‘성공’은 산업화 시대의 표상과도 같았으며, ‘개천에서 태어난 용’은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희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경제 성장의 과실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그 결과 상류층과 하류층의 경제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향한 추억과 회고의 시선으로 현재를 돌아보는 드라마들이 대중의 공허한 일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1960년대 지방 소도시 춘천의 궁핍한 현실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 대도시 서울에서의 화려하지만 허무한 삶의 한 지점에서 막을 내린 <사랑과 야망>은 1987년 방영 당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김수현 작가의 대표작이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남편이 빚보증으로 남긴 빚을 떠안고 억척스럽게 방앗간을 꾸려가는 어머니와 3남매의 인생 역경 속에는 ‘성공’을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루고자 했던 개발 독재 시대 욕망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외무고시에 합격하고도 궁핍한 환경 때문에 대기업에 입사하여 성공 가도를 달리는 ‘박태준’과 괄괄한 성격으로 성격으로 건설 현장을 누비며 건설회사 사장 자리에 오르는 ‘박태수’ 형제는 개발 독재 시대가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어머니 역시 돈이 생기는 대로 땅을 사들여 강남 개발의 이익을 고스란히 챙긴 인물이라는 점에서 1970년대 부동산 신화의 현실을 상징한다. 여기에 가난이 싫어 도시의 화려한 삶을 꿈꾸다 영화배우로 성공한 ‘김미자’와 헌신적인 사랑으로 박태수의 성공을 내조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은환’까지 가세하면 1980년대가 추억했던 1970년대의 풍경이 오롯이 재현된다. 이처럼 <사랑과 야망>은 급격한 산업화 과정의 성공 담론을 추억과 회고의 시선으로 형상화함으로써 1980년대를 대표한 드라마였다.

1980년대는 세계적인 경기 호황 속에서도 경제적인 신분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던 시절이다. 자본이 자본을 낳고 노동은 노동을 불러올 뿐인 현실에서 개발 독재 시대의 성공 신화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자. 2000년대 이후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모두가 함께 인간답게 잘 살기 위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지 않은가. 이 시점에서 신분 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혔던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선이 주목한 ‘정의’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의 ‘청춘’이 ‘야망’을 주목했던 것과 달리 2000년대의 ‘청춘’은 ‘정의’를 지향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지금 우리 시대의 정신이 올바로 세워지지 않을까?

 

윤석진 교수

충남대 국문과 교수, 국내 제 1호 드라마 칼럼니스트

현재 드라마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동아일보』인터넷웹진 O2에 ‘드라마캐릭터열전’과 『월간 에세이』에 ‘Talk Talk 튀는 드라마’를 연재하면서 트위터(@kdramahub)를 통해 새로운 형식의 드라마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과 『TV드라마, 인생을 이야기하다』 등의 드라마평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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