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직시절 김준엽 총장 (사진제공=홍보팀)








































김준엽 9대 총장이 지난달 7일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맨땅에서 시작한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아시아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대학발전계획조차 없던 1980년대 현재의 캠퍼스의 근간을 구상해 문서화 시킨 인물이 바로 김준엽 전 총장이다.

김 전 총장은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본교 총장으로 재직했다. 2년 8개월 만에 군사정권에 의해 학교에서 강제사임 당했지만 그의 총장시절은 짧고 굵었다. 김 전 총장이 세상을 떠난 뒤 국내 각계의 사회단체들은 서명을 모아 사회장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신 장례 때문에 교통을 통제하는 등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친다면 아버님이 불편해 하실 것’이라는 아들 김홍규(불어불문학과 66학번) 씨의 뜻에 따라 장례를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렀다. 학교장 역시 가족들의 뜻에 따라 이뤄지지 않았다.
광복군 출신으로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인 김 전 총장이 생전에 집필한 그의 자서전이자 역사서 <장정>을 토대로 그의 삶을 돌아봤다.

 

“나는 학병으로 나가 중국 전선으로만 간다면 일군을 탈출하고 내가 동경하던 우리의 독립군, 우리의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 1권 65페이지
김 전 총장은 1920년 평북 강계 출생으로 신의주고보(新義州高普)를 졸업하고 동경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도탄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진단하고 치료방법을 찾고자 역사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군사가 부족해 학병을 징집하고 있었고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독립군에 합류하려는 계획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지못한 척 징집에 응했다. 이듬해 그는 중국 쉬저우(徐州)로 배치됐다. 운 좋게도 미 해군이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자 부대에 신병 10여명을 남기고 모두 작전에 동원했고 기회를 엿보던 김 전 총장은 새벽녘에 탈출에 성공한다.

“나는 성공했다. 자유의 몸이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권 171페이지
그는 일본군에서 탈출 후 중국군과 만나 광복군에 합류한다. 여기서 장준하 선생과 김구 선생을 만난다. 이때 광복군은 OSS(美 CIA의 전신)와 합작해 국내침투 작전을 앞두고 있었다. 1945년 8월. 드디어 준비가 끝나고 국내투입작전을 꾀하던 광복군은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8월 10일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면서 작전이 무산된 것이다. 1945년 귀국을 앞둔 20일 동안 김 전 총장은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한다. 김구 선생이 ‘함께 조국을 위해 일하자’고 부탁 했지만 그는 학문에 대한 관심과 대학을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학계를 택한다.

“그러면 나의 적성은 무엇일까? 학문에 대한 정열도 정열이려니와 정치에는 흥미도 없을뿐더러 권모술수나 머리 숙일 줄 모르는 내 성격은 관료로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5권 30페이지
중국이 그의 인생 2막이었던 만큼 그는 ‘중국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학자로서의 인연이 시작됐다. 1946년 중국 국립 동방어문전문학교의 한국어담당전임강사로 지내다가 1949년 귀국 후 본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85년 총장 퇴임직전까지 36년을 본교에 봉직했다. 그는 지역연구를 중시해 1957년 아세아문제연구소(아연)를 설립했다. 자신이 중국어를 몰라 고생했던 시절을 떠올려 어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했다. 중문과 초대 학장직을 맡았고 중국학연구회(현 중국학연구소)를 창립해 초대 소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또 당시 ‘본교생들이 거칠어 여학생이 진학을 기피한다’는 세간의 소문을 개선하기 위해 입학 시 수학 대신 가정을 택할 수 있게 해 여학생을 배려했다.

“나는 결코 비굴한 행동을 취하면서까지 총장 자리에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3권 31페이지
김 전 총장은 1982년 9월 3일, 제9대 총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본교는 재정난이 심해 교수들 월급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재단과 전 총장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고 재정난으로 인해 학교 이미지가 나빠지자 교우회와도 사이가 안 좋았다. 교사(校舍)도 부족해 증가하는 학생을 수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문제 외에도 △직원 수 △행정기구 △분교(조치원캠퍼스) 발전 등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적했다. 모두 재정과 관련된 문제였고 김 전 총장은 후원을 받기위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아연시절 ‘작은 거지’라는 별명이 붙었던 김 전 총장은 총장시절에는 ‘큰 거지’로 불렸다. 김 전 총장은 모금활동을 위해 당시 재단의 이사인 기업가들을 찾았다. 이후 전국각지에 있는 교우회를 방문해 교우들의 도움을 청했다. 그는 또 인사(人事)문제에 공정해야 한다는 자신의 뜻에 따라 직전 총장인 김상협 총장 시절 보직에 있던 누구도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변동시키지 않았다.

“말로만 발전을 떠든다고 하여도 소용이 없고 발전하는 구체적인 양상이 눈에 보여야만 사기는 정말로 진작되는 것이다”- 3권 131페이지
김 전 총장은 교사신축을 가장 중요하게 추진했다. 재단 이사들을 차례로 만나 3개월 만에 100억원의 지원을 받아냈다. 이 지원을 통해 △과학도서관 △구로병원 △법학관 △정경관 등을 착공 또는 준공했다. 이로 인해 각 단과대의 단독건물 사용의 꿈을 이뤄냈고 홍보활동을 통해 연세대보다 입시성적을 올려 학내 구성원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또 6년 만의 정기 고연전 승리도 사기 진작에 한 몫 했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절약을 강조한 그는 솔선수범해 매달 감사를 받았고 교수들의 회식비를 줄였다. 특히 회식사유가 없을 경우 회식을 금했다. 또 교내 물품구매 입찰과정에서의 직원과 업자간의 흑막을 걷어냈다. 결국 학교는 1984년 말 은행 빚을 청산했고 이듬해에는 교직원이 200여명이나 증가했다. 직원대우는 이전보다 좋아졌고 예산집행도 정상수입으로 집행할 수 있었다.

“실은 대학에서 학교운영이니 교수들의 연구이니 교육이니 어느 하나도 학생과 관계없는 것이 없다”- 3권 193페이지
그는 학생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반정부 성향의 학생시위가 잦았다. 김 전 총장은 사실 시위를 싫어했다. 시위가 일어나면 학교가 마비되고 강의도 되지 않고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면 부상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문교부의 압박도 그가 시위를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다.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문교부는 주동학생들을 당장 제적시키라는 학칙을 무시하는 지시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위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민주주의를 옳게 시행해야지, 학생들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제적시키지 않는 그에게 ‘총작직에서 그만 물러나시라’는 정부의 압력은 결국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총장직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나의 일생의 신조 그대로 담담한 마음으로 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4권 22페이지
학생들은 김 전 총장의 사퇴를 반대하며 시위를 열었다. 총장 사퇴를 주장한 시위는 많았지만 총장을 물러나지 말라는 시위는 최초였다. 하지만 그는 총장재임시절 자신이 이루려던 것들을 대부분 마무리 지었다고 판단해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학교를 떠나 퇴임을 할 수도 있었지만 총장이 교수로 돌아가는 선례를 남기기 위해 정년까지 그는 평교수로 남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가 학교에 남아있는 모습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정부의 신경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학생들의 빠른 복교를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종의 망망(茫茫)을 시작했다. 귀국 후 학교에 돌아왔지만 정부는 그를 소위 ‘블랙리스트’로 지정해 연구실마저 빼앗았다. 결국 퇴임식조차 갖지 못한 채 학교에서 두 번째로 쫓겨난다. 이후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고 여행을 하며 4년여의 무직(無職)시절을 보낸다. 이후 정치계의 많은 직책을 고사하고 그는 사회과학원의 이사장직을 맡고 여생을 집필활동에 몰두했다.

평생을 학자의 삶을 살아온 그는 ‘시대의 스승’이라 불린다. 시대의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대통령부터 재학생까지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았다. 조광(문과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김준엽 총장님은 현대 사회에서 교수들에게 가장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김 전 총장 재임 당시 고대신문 주간교수를 지냈던 오탁번(사범대 국어교육학과) 명예교수는 ‘사람의 일생을 A에서 B까지의 선분으로 비유한다면 평생 동안 그 선분의 오차범위 안에서 지조를 지키며 초지일관하고 있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의 신’ 김준엽 전 총장의 ‘장정’은 끝났다. 하지만, 그의 회고록은 평소에 즐겨했던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라는 말처럼 후학들에게 생생한 역사교과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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