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前 총장 추모기획] - 아들 김홍규(불어불문학과 66학번) 씨 인터뷰

(사진=김진현 기자 gunner@kunews.ac.kr)

 “아버지, 진인사(盡人事) 하셨으니 편한 마음으로 대천명(待天命) 하십시오” 김준엽 전 총장은 아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달 7일, 김 전 총장은 가족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삶의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평생 학문에 열중하며 한 길만을 묵묵히 걸어간 ‘선비’ 김준엽 선생. 시대의 스승으로 불리는 김 전 총장의 삶을 아들 김홍규(불어불문학과 66학번) 씨 눈을 통해 마주해봤다.

 외부에선 인정받는 학자이신데, 아버지로서 어떤 분이셨나요

"꼿꼿하신 분이셨어요. 오후 10시에 주무시고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평생 하셨죠. 항상 책상에 앉아계셨습니다. 식사시간도 정확하셔서 제가 5분만 늦어도 벼락이 떨어졌죠. 골프, 바둑, 화투, 낚시 등 일체 잡기도 안하셨어요. 쇼핑을 한다든지 그런 것도 시간 아깝고 잡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신 듯했습니다. 요즘 보통 아버지들처럼 같이 놀아주거나 그러진 않으셨죠"

 섭섭하거나 서운하진 않았나요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습니다. 6.25를 거치면서 대만으로 갔었는데 그 때 단칸방에 살았어요. 단칸방이라 어디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에 누가 찾아올 때면 그냥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듣곤 했죠. 탈출기라든지 항일운동이라든지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더 실감나게 다가왔죠”

 가정에 소홀했을 것도 같은데요

“표현을 잘 안하셨을 뿐이지 가정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어요. 집안 대소사에도 관심을 많이 보이셨고요. 어머니와 독립군 때부터 평생을 함께 하셨기에 단단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믿고 이해했어요. 평생 동지 같으셨습니다”

 어머니와는 독립군 활동을 통해 인연을 맺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금 상상력을 동원해야하는 부분이죠. 제 외조부는 독립운동가 민필호 선생입니다. 외조부께선 이범석 장군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셨죠. 이범석 장군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아끼셨어요. 미군의 조선 상륙작전 OSS훈련 당시 장군은 신임하던 아버지를 부관으로 발탁했고 딸처럼 여겼던 어머니를 비서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이범석 장군이 두 분을 붙여주려고 공을 들이셨다고 해요. 부대 근처 민가에서 출퇴근하는 어머니를 항상 아버지께 바래다주라고 명령하셨죠. 이게 하루 이틀 반복되면 이국땅에 있는 젊은 남녀가 사랑을 싹틔울 수밖에 없었겠죠?”

 김 전 총장님 고향이 북한이라고 들었습니다

“평안북도 강계가 고향이십니다. 해방 후 이북에서 결혼해 살고 있던 아버지 누님을 제외하고 4형제 모두 남쪽으로 내려왔죠. 이런 사정을 북한도 다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이산가족상봉 얘기가 오갔던 남북적십자회담에 수석자문위원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몇 번 오가셨죠. 그런데 어느 날 북측에서 누님 사진을 가지고 왔다고 해요. 사진을 보여주며 아직 살아계신다고 먼저 만나게 해주겠다면서요. 그런데 아버님께선 ‘이산가족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나 혼자만 가족을 만날 수 없다’며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도 아버님은 누님을 만나 뵙지 못했죠. 국무총리직을 거절한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장관, 국무총리 등의 관직을 열 두 차례나 거절하셨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유교적으로 얘기하면 관직에 나가는 게 맞겠죠. 주위에서도 국무총리면 영의정이 아니냐며 관계진출 권유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후학들을 생각하신 듯해요.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셨겠죠”

 1985년 본교 총장 재임 당시 민정당사를 점거한 학생들 제적여부를 두고 정권의 심한 압박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 서울 주요대학 총장들에게 저녁식사를 제안했습니다. 식사자리지만 정부 입장을 전하는 자리이기도 했죠.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을 제적시키라고 압박했어요. 아버지는 판결 전까진 학생들은 무죄이며 제적은 적절한 절차를 밟아 결정되는 것이지 총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대응하셨습니다. 또 야당인 민한당사를 점거한 학생들은 귀가시켰으면서 여당을 점거한 학생들은 제적시키는 게 옳은 것이냐며 언성을 높이셨다고 합니다. 식사하면서 천천히 얘기해보자는 말에 ‘학생들을 제적시키는 것은 사형이나 마찬가진데 제자들 운명 앞에서 밥알이 넘어가느냐’고 호통 치셨다고 해요. 결국 끝까지 밥을 드시지 않으셨죠”

 결국 총장직에서 물러나셨는데

“제적을 계속 거부하자 문교부 장관이 아버지께 총장직에서 물러나라고 말해왔습니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재단을 세무조사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겠다면서요. 재단 쪽에도 압력을 가해왔고 결국 사임하셨습니다. 이 때 학생들이 시위를 한 달이 넘도록 벌였죠. 재임 마지막 일정이었던 졸업식은 학생들의 시위속에서 열렸어요. 그들은 식장에서 ‘총장사퇴 결사반대’ ‘고대정신 수호하자’등의 구호를 외쳤었죠. 아버지는 사퇴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것을 평생의 영예로 생각하셨고 눈물 흘리며 물러나지 말라고 외쳤던 제자들에게 고마워했습니다”

중국 정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훈장을 받으셨죠

“한중관계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유학했던 곳이기도 하고 베이징대 전신 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기도 했으니까요. 생전에 중국내 한국학 연구소 설립을 위해 힘 쏟으셨어요. 그 결과 북경대, 칭화대, 절강대 등 많은 대학교에 연구소가 자리 잡았습니다. 또 아버지는 우리의 옛 문화와 독립운동의 흔적을 복원하는 사업에도 참여하셨어요. 최치원 기념관 설립, 고려관 복원, 임시정부 청사 복원, 윤봉길 의사 기념비 설립 등 많은 걸 이루셨죠”

 김 전 총장님 별세가 한중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끈끈하던 한중관계 맥이 끊기게 생겼죠.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흐트러질까 걱정됩니다.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는 만큼 아버지께서 추진했던 일을 계승하는 곳이 있으면 좋겠어요. 고려대 법인이든 추모사업회든 말이죠. 이를 위해 자금이 필요하기에 여러 곳에 알아보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원에도 지원을 부탁드렸고 고려대 대외협력처에도 얘기를 해놨는데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습니다. 고려대가 신문에 광고만 내고 끝낼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아버지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있었느냐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한숨에 섞인 담배 한 모금을 내쉬었다. “아버지 가시는 길에, ‘혹시 유언으로 남기실 말씀이 없느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없느냐’고 물어봤어요.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시더라고요. ‘특별히 할 말은 없다. 내가 평생 살아온 것이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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