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김준엽은 ‘학도병 탈출 제1호’였다. 그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된 지 한달만에 탈출을 감행해서 중국유격대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평생의 동지 장준하와 만난 그는 그와 함께 중국대륙 중경의 임시정부를 찾아 6000리 장정에 나선다.

청년 김준엽은 ‘영원한 광복군’이었다. 광복된 조국에 그는 개선장군처럼 입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던 시기 정치와 학문의 두 갈림길 중 학문을 통해 역사를 바로세우겠다는 고독한 선택을 한다.

교수 김준엽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리 후보 1순위’였다. 초대 총리 이범석 장군으로부터 시작해서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총리직을 비롯한 온갖 공직 제의를 고사한 그는 평생 학문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다.

학자 김준엽의 고민과 꿈은 무엇이었을까? 김준엽이 게이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가 가장 큰 관심을 둔 것은 동양사였다. 그의 고민은 왜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일본만 근대화에 성공하고 한국은 식민지로, 중국은 반식민지로 전락했는가였다.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역사학탐구를 시작한 김준엽은 중국 국립중앙대학 대학원에서 본격적인 중국근대사 연구에 몰입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가 패배하자 김준엽은 1949년 중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그 뒤 그는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학자로서 김준엽이 일생을 통해 천착한 분야는 공산권 연구, 독립운동 연구, 중국근현대사 연구라 할 수 있다. 공산권 연구 분야에서 주목할 업적은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이다. 이 책은 현재 한국공산주의 운동의 고전이라 평가받을 만큼 큰 의미를 지닌다. 독립운동사에 대해서도 김준엽은 꾸준히 관심을 보였다. 그가 중국에서 경험한 독립운동을 뒤돌아보고 정리한 회고록은 당시 한국인의 중국 내 독립운동의 실상을 상세히 보여준다. 그러나 김준엽의 주전공은 중국근현대사 연구라 할 수 있다.

중국사 전공자로서 김준엽의 최초 연구서는 <중국공산당사>이다. 이 책에서 밝힌 그의 문제의식은, 세계 평화에 위협을 줄만큼 커다란 괴물로 성장한 중국 공산당의 정체였다. 중국공산당의 승리에 대한 김준엽의 설명이 주목되는 점은 중국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그 과정을 일관되게 관찰하고 분석했다는 점이다. 공산당 창당과 국공내전의 승리를 일본의 침략, 소련의 음모 그리고 미국의 정책 실패 등 외인론의 관점에서 그는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령에 충실했고 그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주목할 것은 이렇게 민족적이지 않은 중국공산당이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다.

중국 근대화의 계기도 김준엽은 외부에서 찾았다. 중국의 근대화는 내부의 경제발전에 따라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진 유럽사회의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왜 중국 전통사회는 유럽처럼 근대사회로 나아갈 수 없었을까? 김준엽은 그 이유를 유목민족의 부단한 침략에서 찾았다. 외부 제국주의의 압력과 내부 유목민족의 봉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김준엽이 주목한 것은 신해혁명이었다. “공허하지 않고 실정에 부합하며 창조적인 사상을 소유한 쑨원”에 의해 후진과 정체의 상징인 만청왕조가 타도되고 공화제에 입각한 중화민국이 수립된 것은 김준엽에게 중국현대사의 기점이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에게 신해혁명은 정복왕조인 청조가 타도되었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사에 자유와 민주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점에서 중국사의 대사건이었다. 김준엽이 5·4운동을 민주주의가 사회적으로 확산된 계기였다고 설명하는 것도, 이 운동의 지도자로 천두슈가 아닌 후스를 드는 것도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학생 김준엽에게 일본 학도병으로부터 탈출하여 6000리 장정을 떠나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이 권력 쪽에서 권한 장관이니 총리니 하는 자리를일체 거절하고 꼿꼿한 지조의 삶을 살 수 있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우리가 이토록 그리워하게 만든 김준엽 선생의 꿈,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민경현(본교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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