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김다혜 기자
9월 30일부터 3일동안 일본 근세문학회 추계대회가 본교 일본연구센터의 주관으로 개최됐다. 일본 근세문학회는 일본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학회로 매년 두 차례에 걸쳐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번 추계대회는 최초로 일본 국외에서 열렸다. 고대신문은 6일(목) 이번 학술대회의 ‘임진왜란과 일본근세문학’의 발표자이자 일본연구센터 소장인 최관(문과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를 만나 이번 행사의 의의와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문학에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 근세문학회 학술대회가 최초로 일본 국외에서 열렸는데 이는 어떤 의의가 있는가
“이번 학술대회는 본교 일본연구센터가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연구를 선도해온 집단임을 증명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일본연구센터와 일어일문학과의 역량이 국내에서 머물지 않고 일본 연구자들의 학술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높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본교에 대한 평판과 인지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본교가 유명하긴 하지만 아직도 외국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외국의 교수들이 직접 본교를 방문하면서 많은 홍보효과를 거뒀다”

-한국이 일본 근세문학을 연구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일본하면 학술적 부분을 중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한국이 진정으로 일본을 이해하고 파악해 일본과 더 좋은 관계를 맺거나 글로벌 시대의 선두로 나아가지 못한다. 일본과의 진정한 선린우호라고 하는건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잘 알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본교는 세계 고대라고 하며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우선적으로 바로 옆 나라부터 알아야 한다. 인접국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이해없이는 세계로도 나아갈 수 없다. 특히 일본은 우리의 긴 역사 속에서 피해를 받은 적도 있었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역사 속에 새겨져 있는 나라다”

-특별히 근세문화를 연구하는 이유가 있나
“일본은 근대이후 경제강국으로 발전했고 국내에 침략해 식민지 지배를 했다. 한국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갑작스럽게 크게 발전하고 변화한 걸로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성장이 있을 때 갑작스러운 것은 없다. 항상 성장 배경에 그 전 시대에 원인이 있고 변화를 이끌어낼 힘이 있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 이후의 발전의 원인 구조들은 바로 그 전 시대인 일본의 근세시대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근세연구가 중요하다. 또한 일본인들의 현재의 의식구조, 행동양식 등 일본인들의 문화는 전부 근세시대의 영향 받고 있다”

-에도막부가 임진왜란 이후 민중들에게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었다. 임진왜란 도중 히데요시가 사망했고 그 다음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로 넘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 당시 2인자로서 힘을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힘을 규합해 도요토미를 지지하는 세력을 몰아냈다. 전투에서 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실질적인 일본의 실권자가 돼 에도막부를 열었다. 기존의 정권을 몰아낸 새로운 정권은 민심을 안정시켜야한다. 하지만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복수의 문화라는 것이 있다. 전쟁, 싸움에서 지면 꼭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상식으로는 일본은 아무 이유없이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에 조선이 중국과 함께 일본을 침략할 것이라는 불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관련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금시했고 천하태평을 내세워 조선왕조와 화평관계를 갖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임진왜란을 기록하기 위해선 그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장이 드러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아래에 있었다. 이런 기록이 남게 되면 에도막부의 시조가 신하였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부분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에도 막부가 완전한 안정을 찾은 다음에는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어느 정도 묵인했다”

-에도시대 초기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은 주로 비망록이나 편지 등, 참전 무사들의 전쟁체험이라는 제한적인 주제로 기록됐다. 조선에도 일본처럼 민중에 의해서 쓰여진 기록이 있었나
“사명대사의 임진록, 조선인들의 피난생활, 포로로 갔다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 등 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개인차원의 전란체험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시가, 국가가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까지 모두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은 그 기록들을 없애려고 했지만 기록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논개 이야기처럼 각 지역에 전승으로 남아있기도 했고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전쟁터였고 피해자였기 때문에 상처 뒤에 생긴 흉터처럼 역사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전쟁에 대한 기록은 양국 모두에서 일어났는데 서로의 입장이 달라 차이점이 있을 것 같다
"일본의 입장에선 정권에서 기록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경향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일본 병사들이 조선, 명나라의 어떤 장군과 싸웠는지를 알고 싶어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전쟁을 전부 체험한 것이 아니라 30만 정도가 전쟁을 겪고 돌아가 민중에게 말로만 전했다. 반면 한국은 민중들이 전부다 온몸으로 체험했다보니 기록이나 문학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임진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현실적인 고통을 왜군들에게 당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문학이 많이 나왔다. 또한 일본은 일본중심적인 시각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18세기 후반, 임진왜란의 특별한 인물들을 연극화했다. 예를 들어 일본 장군이 조선에서 일본의 용맹성을 드러낸 이야기를 연극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장르는 지금까지도 공연이 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전쟁이 있었지만 수백 년 세월이 지나면서 나라별로 받아들이는 것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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