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영국 캠브리지 외곽에 있는 거처에 짐을 풀면서 내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나의 유학생활이 일 년 이상 지속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일 년 동안 캠브리지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 활동을 마치면, 귀국하여 준비중이였던 박사논문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문학을 전공하는 내게 고색창연한 캠브리지는 학문의 향으로 그윽한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이 향에 잔뜩 취해 천국의 삶을 하루라도 더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영국에서는 유일하게 런던대학에서 서사학 석사과정을 개설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래서 순전히 유학생활을 조금 더 연장할 요량으로 이 과정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 입학허가가 났다. 이 과정에 등록한 학생은 나를 포함해 단 둘에 불과했다. 그래서 모든 수업은 교수님들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롤랑 바르트나 제라드 쥐네트와 같은 이론가들의 글을 읽고 이를 문학비평과 연계하는 세미나 시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처음에 담당 교수들은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나를 마뜩해 하지 않았지만 가끔 예상치 못한 문제를 탁자위에 올려놓던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의 일부는 내 질문의 타당성을 따져보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창의적 사고를 중시하는 영국의 지적전통이 엉뚱해 보이는 질문조차도 진지하게 사유하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답을 시원하게 제시할 수 없을 때, 감청색 찻잔을 들고 창 밖을 응시하던 구부정한 노교수님의 상기된 얼굴은 여전히 삼삼하고 새롭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 박사논문 주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는 내 분야의 석학 중 한 분인 노만 페이지 교수님의 덕을 많이 보았다. 사실 페이지 교수님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러나 짧은 내 비평문 한편과 함께 만나 뵙고 싶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는데 흔쾌히 만남을 허락해 주셨다. 교수님은 캠브리지의 작은 찻집에서 온화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셨고 내 분야의 미개척 영역이 갖는 학술적 가치를 자상히 알려주셨다. 페이지 교수님의 음덕으로 박사논문 주제를 결정하고 셰필드 대학 영문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셰필드 대학은 당시 미학과 언어철학에 심취해 있던 내게 최상의 연구여건을 제공해 주었다. 영문과는 신비평의 거목이자 미국에 신비평을 소개한 윌리엄 엠슨 교수가 학과장으로 재직했던 곳으로 명성이 있었고 내 지도교수인 닐 로버츠는 영국의 문화이론을 견인한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제자로 네오-맑시즘과 바흐찐의 언어이론을 접목해 활발히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셰필드에는 데이빗 쉐퍼드와 같은 석학들이 세계에서 유일한 바흐찐 센터를 이끌고 있었다. 당시 바흐찐의 초기 사상에 몰두해 있던 내게 이보다 더 나은 연구 환경은 없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지도교수와 나의 첫 만남은 다소 어색하게 끝나고 말았다. 면담이 진행되던 중 한국의 사제지간의 정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도교수는 교수와 학생과의 관계는 학문적인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냉정하게 단언했기 때문이다.

요지는 공부를 잘 하면 돕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둘 사이의 관계가 유지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박사 졸업장을 받는 날이 돌아왔다. 그 날 지도교수는 만사를 제치고 축하의 악수를 건네기 위해 나를 찾았다. 단순한 지식의 매개자가 아니라 스승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먼 나라에서 건너 온 극동의 한 젊은이를 박사과정 내내 대등한 학자로 대접해 준 분이었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라며 독창적인 연구를 독려해 주신 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학시절 얻은 나의 최대의 자산은 박사졸업장이 아니라 참스승에 대한 깨달음이다. 한없이 어설픈 제자를 무한히 신뢰하고 제자가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따뜻하게 격려하는 그런 스승 말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그 분과 굳게 악수를 하던 날 난 새로운 길을 떠나는 학생이 되어있었다.








김동욱(문과대 교수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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