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인쇄 매체의 위기를 말하는 이 순간, 위기를 말하기보다 위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쇄 매체의 가장 대표적 아이콘인 책을 만드는 사람, 편집자들은 위기를 소리쳐 외치기보다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인 활자와 함께 고요히 위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중이다.

여전히 '활자가 내게 온 순간'을 잊지 못한다는 '열린책들' 강무성(불어불문학과 81학번) 주간과 5년차 편집자 김정현(국어국문학과 00학번) 씨를 만나 책과 편집, 출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왼쪽부터 '열린책들' 강무성(불어불문학과 81학번) 주간과 김정현(국어국문학과 00학번) 편집자. (사진 | 김보건 기자 passion@)

 

정보 선택이기보다 정보 생산
“원고가 앞에 놓였을 때 편집하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저자의 글에 편집자가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할 것인지, 아니면 편집자가 개입을 많이 할 것인지. 원고를 앞에 두고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많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운 나의 편집관은, 내가 개입해서 훨씬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개입하는 것이고, 약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개입하지 않는 거예요. 후자는 말하자면 저자의 원고가 갖고 있는 결함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원고 편집 이전의 역할로서는 아직 쓰이지 않은 원고를 쓰게 하는 것이 있어요. 저자에게 동기를 부여해 의욕을 갖게 만들고 원고를 쓰는 동안 계속해서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죠. 우리나라 출판계는 저자가 알아서 쓰고 편집자가 후에 편집하는 관행이 지배적이지만, 외국의 경우 저자와 편집자가 파트너 관계가 돼서 편집자가 계속 개입을 합니다. 사실 이미 다 써온 글을 뒤엎게 하는 게 참 힘들거든요. 저자도 글을 쓸 때 어떻게 써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 때문에 원고를 쓰는 동안 개입하면 훨씬 명작이 나올 수 있다고 봐요. 일본의 경우에는 편집자에게 시간을 넉넉하게 줘서 어떤 분야를 공부하게 합니다. 편집자는 그 분야에서 어떤 논의가 진행 중이고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낸 뒤 저자를 물색해 책을 쓰도록 역할을 만들어내지요. 보통 편집자를 교정보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데 사실 편집자의 역할은 꽤 광범위해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렇게 쓰이지 않은 원고를 쓰도록 하는 주도적인 컨텐츠 생산자로서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최근 블로그나 다른 미디어들을 통한 1인 출판 시대가 열렸다고 하는데, 만약 누구나 출판을 할 수 있고 그게 좋은 거라면 계속해서 명작이 나와야죠.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그만큼 편집자의 개입이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요즘같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서는 오히려 제대로 된 정보를 찾아 편집해서 전달하는 편집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모든 지식의 총체적 결합
“편집은 전문적 지식과 보편적 지식의 결합체라고 생각해요. 책에 담긴 전문적인 지식을 보편적인 편집 기술과 안목을 이용해서 책으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편집자한테는 잡다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가 있어요. 책에 담긴 내용에 관한 지식이 있으면 교정을 볼 수 있지만 모르면 손도 못 댈 수가 있거든요. 후배가 황당한 교정을 본 일이 있는데, 중국 신화 속 인물인 ‘공공씨’를 ‘○○씨’라고 교정을 봤어요. 책의 내용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생기는 일들이죠.

쓰이지 않은 원고를 쓰게 하는 편집자로서 ‘쓰여야 할 것’을 찾을 때 중요한 것은 의식의 폭을 넓히는 겁니다. 내 의식의 촉각 바깥에 있는 것들은 나한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문을 열 때 뒷사람을 위해 붙잡아주지 않는 사람은 의식의 감각이 거기까지 밖에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폭을 넓혀서 더 많은 것들을 의식 속에 넣으면 보이는 게 더 많아집니다. 그래야 그 보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되겠죠.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붙들고 있으면 도어맨이 돼버리겠죠. 언제 문을 놔야할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식의 감각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꼼꼼함. 편집할 때는 정말 천지사방이 지뢰밭이나 다름이 없어요. 본문 내용에서 오탈자가 나기도 하고, 저자 이름이 틀리거나 심지어 표지가 거꾸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세심함이 있으면 좋지요.”

위기는 책이 더 책다워지는 기회
“실제로 책이 많이 안 팔리니 위기는 맞지만 꼭 부정적인 건 아니라고 봐요. 어쩌면 그동안 책이 어울리지 않게 너무 많은 역할을 담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매체들이 책에게 주어진 넘치던 역할을 가져가면 책은 더 책다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인쇄 출판을 중단했는데, 백과사전이 차지하고 있던 많은 공간과 비용이 없어지면 그 공간과 비용이 다른 책들에 쓰이게 될 수 있게 되겠죠. 그러면 다른 책들의 모양이 변할 겁니다. 지금은 책의 재질, 디자인 다 살펴보고 사잖아요. 소유하고 싶은 내용을 담은 종이묶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유하고 싶은 물성을 가진 형태로 변해서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된 거죠.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말 인쇄해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더 훌륭한 재질로 만들어지고, 소비하는 사람들도 더 많은 돈을 지불해서 보게 된다면 위기는 점차 해소되겠죠. 단기적으로는 위축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얼굴을 가진 출판의 시대가 올 거라고 봐요. 분명 인쇄해서 보는 종이책의 영역은 사라질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요. 과거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나무망치, 쇠망치, 전기 공구를 모두 사용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는 책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고, 넘쳐나는 정보 중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선별하는 감식안을 가진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편집자에게 더 큰 역할들이 기대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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