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 쉰들러는 1879년 당대의 저명한 화가 에밀 야콥 쉰들러와 부인 안나 베르겐 사이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하기 전 공연감독 막스 부어카르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 그리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의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들 중 클림트는 알마 쉰들러의 첫키스를 차지한 남자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대표작 ‘키스’의 모델로 알마 쉰들러가 거론되기도 합니다. 작곡 또한 쳄린스키에게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알마 쉰들러는 1902년 3월 9일 구스타프 말러와 약 20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결혼을 합니다. 말러는 알마가 가정에 충실하기를 바랐습니다. 알마는 남편의 뜻에 따라 작곡가 대신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첫 딸이 죽고 나서 알마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작품 활동을 재개하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내연관계를 가집니다. 이 사실을 안 말러는 그녀의 마음을 잡기 위해 그녀가 작곡한 작품들을 대중에 발표하고 그녀를 위한 교향곡들을 작곡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우리에게 ‘천인교향곡’으로 알려진 ‘교향곡 8번’이 바로 알마 말러에게 헌정된 곡입니다. ‘교향곡 6번’과 말러의 유작인 ‘교향곡 10번’ 또한 알마 말러에 대한 사랑고백이 담긴 작품들입니다.

 구스타프 말러가 사망한 뒤, 알마 말러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두 번째 결혼을 하기에 앞서 화가인 오스카 코코슈카와 잠시 연인관계를 맺습니다. 알마 말러가 1915년에 알마 그로피우스가 되어 떠난 후에도 코코슈카는 그녀를 닮은 인형을 늘 데리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알마에 대한 집착을 보입니다. 코코슈카의 대표작인 ‘바람의 신부’가 바로 알마 말러에 대한 그의 병적인 사랑을 잘 반영한 작품입니다. 알마와 그로피우스 부부는 그로피우스의 잦은 해외생활로 인해 소원해진 관계에 1918년에 태어난 아들의 생부논란까지 제기되며 결국 파경을 맞습니다.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이 당시 알마의 공공연한 애인으로 마틴의 생부로 지목된 것입니다.

 두 번의 결혼생활이 끝나고 알마는 약 10년간 베르펠과 동거생활을 한 후 알마 말러-베르펠이라는 이름으로 1929년에 베르펠의 아내가 됩니다. 알마가 자신의 성에 말러를 먼저 사용한 이유는 그녀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녀가 가장 사랑한 남자가 말러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후 알마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베르펠과 함께 유럽 각지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여생을 보냅니다. 

조호희(문과대 사학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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