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욱 취재 2부 기자
1일 정오, 중구 한국은행 맞은편에 위치한 분수광장은 근로자의 날을 기념하는 총파업 퍼레이드 준비로 분주했다. 북, 장구를 멘 풍물패와 히피를 연상시키는 더벅머리의 청년, 확성기와 피켓을 든 고등학생 등 이질적인 면면이다. 50여 개에 이르는 단체가 ‘부당한 억압을 거부한다’는 대주제 아래 모였다. 청년실업자, 장애인 등 대부분이 사회에서 소외받는 이들이다.

다양한 단체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무리가 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새빨간 립스틱으로 화장한 여성들. 민망할 법도 한데 속옷을 들고 춤추는 이들의 얼굴에선 오히려 여유로운 웃음이 엿보인다. 이들은 ‘슬럿워크 코리아(Slut Walk Korea)’, 우리나라 이름으로 ‘잡년행동’이란 여성운동단체다. 슬럿워크는 ‘성폭력을 피하기 위해선 헤픈 여자(Slut)처럼 입는 것을 지양해야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거부하는 세계적인 여성운동이다.

이번이 첫 참가라는 한라(여·21세) 씨는 다소 들뜬 기색이었다. 대학생인 그녀는 트위터를 통해 우연히 슬럿워크를 알게 됐고 취지에 공감해 이 행사에 참가했다. “학교만 가도 화장, 옷차림을 자신의 잣대로 강요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헤프게 입지 말라’는 말이나 ‘좀 꾸미고 다녀라’는 말이나 바탕은 같아요. 여성의 성애화와 남성중심적·가부장적 사회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죠. 오늘은 그런 일체의 부당한 강요에 저항하겠어요”

오후 2시 경, 행진을 시작한 무리에 섞여 잡년행동은 명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명동예술극장에 이르자 이들은 마이클잭슨의 ‘They don't care about us’에 맞춰 준비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춤을 추던 그녀들은 돌연 가위를 꺼내 입고 있던 브래지어를 잘라 하늘 위로 던져버렸다. 구경하던 이들이 어리둥절 하는 사이 하이힐도 벗어던지고 화장도 손으로 문질렀다. 화장이 번진 얼굴 옆으로 ‘강요된 꾸미기 노동을 거부한다’는 피켓이 비로소 눈에 보인다. 퍼포먼스의 의미를 이해한 관중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미깡’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한 회원은 퍼포먼스를 끝낸 뒤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가끔씩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던데, 저희는 진보의 치어리더가 아닙니다. 우리가 눈길끌려고 달고 다니는 포스터는 아니잖아요? 순수하게 여성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주세요”

행진을 함께한 이들은 잡년행동의 구호를 따라 외치며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잡년행동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얼마나 전달됐을까. 하지만 명동 중심에 우뚝 선 그들의 모습에서 적어도 오늘만큼은 어떤 부당한 억압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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