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는 공산주의자로서 혁명을 찬양했던 음악가인가? 아니면 공산주의에 희생되어 현실과 타협하며 평생을 불운하게 살아갔던 음악가인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있습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러시아 전역에 공산화의 열망이 들끓을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페테르부르크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음대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작곡가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할 무렵 러시아는 제2차 혁명이 성공하여 스탈린 지배의 소비에트 연방을 이루게 됩니다.

스탈린은 ‘작곡가 동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음악, 공산당과 혁명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게 했습니다. 다른 국가의 작곡가들이 표현주의 음악, 무조음악 등의 전위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작곡을 하던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2번 ‘10월에’, 교향곡 3번 ‘5월 1일’등의 공산당 정부에 요구에 맞춘 곡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교향곡 4번과 오페라 ‘므젠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스탈린에게 ‘시끄럽고 괴상하다’, ‘부르주아의 음악’이라고 혹평을 받았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두 곡의 상연을 중단한 후 교향곡 5번 ‘혁명’을 발표하여 명예를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쇼스타코비치는 정치적 비판과 예술적 옹호 사이에서 평생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는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공산당을 찬양하며 쓴 여러 교향곡들과 권력에 요구에 부응하여 작곡한 상업 음악을 만들어 작곡가로서는 유일하게 ‘스탈린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악 사중주 작품들과 몇몇의 교향곡에서는 그의 음악적 자유에 대한 열망과 고뇌에 찬 인생을 담아내는 면모를 보이기도 합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정말로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는지 아니면 공산주의에 소리 없이 대항한 자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음악관이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게 하려고 몸부림쳤다는 사실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죽기 직전, 자신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오범교 (생명대 식품공학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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