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본교는 3기 한총련 의장을 배출하며 NL 온건주사파의 중심에 있었고 학생운동은 여전한 열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청년지식포럼 스토리 K 이종철 대표는 1996년도 안암총학생회장으로 90년대 학생 운동의 선두에 섰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접하고 분개했다는 그는 주체사상을 정의로 믿으며 NL 주사파로 학생 운동에 깊이 몰두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에 연루돼 2년의 구속수감이 끝난 뒤, 급속히 늘어난 탈북자들로부터 북한의 비참한 인권 현실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길을 바꿨다. “그 전까지 북한 인권이 그렇게 비참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투쟁했다고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김정일 정권의 폭압에 협력한 꼴이었다”고 고백한 이 대표. 그는 뒤늦게 스스로의 정의를 찾아 현재 청년들과 호흡하며 북한 인권운동을 이끌고 있다.
한 때 누구보다도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한 그에게 학생운동의 어제와 오늘을 들어봤다.

-재학 당시인 1996년도엔 학생운동의 풍경이 어땠나
“96년은 학생운동의 기점이다. 80년대 말 절정에 이른 학생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은 동시에 몰락이 시작된 시기다. 당시 주된 이슈였던 학원자주화투쟁은 모든 대학의 공통 이슈였기 때문에 한총련을 중심으로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의 학생들이 연대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이 무렵 학생운동 내부적으로 노선 차이가 부각되고 화염병 등 구시대적이고 과격한 투쟁 방식이 재등장하면서 차츰 일반 학생들에게 외면 받기 시작했다”

-당시 운동권 노선은 어땠나
“본교에만도 분파가 상당히 많았다. 특히 PD계열이 많았는데 공과대, 사범대를 중심으로 ‘전학협’, 문과대, 정외과를 중심으로 ‘대장정’ 등이 있었다. NL계열로는 온건·혁신 주사파 ‘사람사랑’, 강성 주사파 ‘자주파’가 있었다. 본교에는 거의 없었지만 PD계열 ‘전학련’, NL 비주사 계열 ‘새벽’ 등 다양한 분파로 나뉘었다”

-노선 간에 갈등이 있었나
“당시 한총련 내부에서 노선 차이가 드러났다. 특히 NL 온건파와 강성파가 투쟁 방법 면에서 의견이 갈렸다. 온건파는 폭력 투쟁을 지양한 반면 강성파는 전민항쟁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과격 투쟁을 주장했다. 이 때 마찬가지로 과격한 투쟁방식을 주장하던 PD가 강성파를 지지하고 점차 축소되던 NL 비주사 계열이 강성파로 넘어가면서 운동 방법이 한층 과격, 좌경화됐다. 한동안 사라졌던 화염병이 다시 등장하고 일부 학생이 프락치로 오해받아 구타당해 죽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 | Story K 제공

-왜 학생운동이 이념적, 정치적 색채를 띠나
“운동에는 방법과 방향이 있어야 한다. 당시 그 두 가지를 집약한 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었다. 특히 김영환의 <강철서신>이 1985,6년 대학가에 유포되면서 주체사상이 운동의 수단으로 채택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가 강요하거나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았는데도 주체사상이 학생사회에 자생적으로 뿌리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과 연계된 지하 조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지도·학습을 받기도 했는데 ‘사람사랑’의 경우 민혁당 김영환의 지도 하에 있었다”

-최근의 학생운동을 어떻게 바라보나
“운동권의 동력이 많이 꺾였다. 과거 한총련 출범식의 경우 6만 명이 모였는데 지금은 반값등록금 시위를 해도 고작 몇 천 명 될까 말까다. 굳이 통계적으로 보자면 30분의 1 이하로 줄지 않았나 싶다. 운동권 단체들이 과격한 운동 방식으로 고립을 자처한 측면도 있지만 시대적 변화로 인한 측면도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생의 사회적 고민이 대학 사회를 통해 표출됐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대학생이 인터넷으로 직접 사회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미 대학을 벗어난 느낌이랄까”

-학생회의 역할을 무엇이라고 보나
“1990년대 이후부터 학생회의 역할이 특히 중요해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학생사회의 지지가 별다른 노력 없이 따라왔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사회가 민주화되고 동아리, 학회 등 학내에 다양한 활동 단위가 생기면서 학생 운동을 기획하고 일반 학생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학생회의 수준 높은 정치력이 요구됐다” 

-최근에는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많은데
“비운동권이 학생들에게 비전을 인정받으면서 대안세력으로 크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 여전히 학생회를 지속적으로 장악하는 건 운동권이다. 사실 그런 낡은 사상을 가지고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운동권, 특히 주사파의 조직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학생 운동을 하던 당시를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치열하고 뜨거웠던 순간들이었다. 아마 지금 한대련 세력들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학생운동의 정서라는 게 있으니까. 주사파 일색의 학생운동이 문제인 것이지 운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대학생이 무언가를 누리기보다는 생산해 내는 단위였다. 지금은 대학생이 개성은 뚜렷해진 반면 주체적이라는 느낌은 덜하다. 사회에서 위로를 찾기보단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담론을 스스로 창조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