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학자들, 그리고 성 해방론자들은 말한다. 인간의 성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물론 현대에 와서 과거보다는 성에 관한한 많이 자유로워졌다고들 말한다. 눈만 뜨고 일어나면 성에 관련된 메시지를 수시로 접하게 되고 성과 관련된 범죄 또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광고의 대부분은 성과 관련된 메시지를 상품화하는데서 시작한다. 게다가 국회의원의 여기자 성추행에서 교도관의 재소자 성추행, 지하철에서의 승객 성희롱, 군대에서의 동성 간 성추행, 강의 시간중의 음담패설에 이르기까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성’이라는 말을 떼어놓고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성과 관련된 사건, 광고가 난무한다고 해서 성이 해방된 것은 아닐 게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엄격한 청교도 문화권내에 있었던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유럽사회는 어떠했을까? 그 당시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은 억압되어 온 걸까? 아니면 자유로운 담론 문화를 등에 업고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성적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왔을까?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푸코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그동안 성은 억압되어왔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권력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해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해방주의자들이 성에 관해 좀 더 많이 떠들고 공공연하게 거론하고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을 추구하는 것이 해방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에 반대한다.

그는 그러한 입장에서 벗어나 복잡하고 다양한 성 장치(dispositif de sexualité)의 메커니즘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으며 제도나 실천 또는 이야기들을 통하여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해 나간다. 성 장치는 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다스럽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표면위로 끌어 올린다. 또한 권력은 성에 관한 일정한 이야기들에 끼어듦으로써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조직화하고 새롭게 제도들을 엮어 나간다.

그가 기존의 억압 가설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그러한 가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7세기 이래 근대 사회의 내부에서 성에 관해 언급되어온 담론들의 일반적 구조 속에서 그 가설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어떻게 권력이 우리들의 일상적 쾌락과 삶에 침투하여 그것을 통제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담론 생산에서 버팀과 동시에 도구의 역할을 하는 ‘앎에의 의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밝히고자하는 것은 16세기 이래, ‘성’에 관한 논의는 규제를 겪기는커녕 반대로 점점 더 선동되어 왔다는 것, 또한 성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의 기술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온 것이 아니라 성적 욕망들을 다양한 형태로 확산시키고 정착시켜왔다는 것, 그리고 알고자하는 욕구는 끊임없이 성적 욕망에 관한 과학(une science de la sexualité)을 구성하는데 몰두해왔다는 것 등이다.

푸코는 이러한 권력의 유형이 법의 형태나 금지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그것은 특이한 성적 욕망들의 세분화를 통해 진행하며, 그것에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적 욕망을 없애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들의 육체 속에 끼어든다. 또한 여러 가지 성적 욕망들의 변종들을 끌어들이며 확대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적 도착의 장착(l'implantation des perversions)은 왜곡된 성 행태를 단순히 교정하기위한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교훈적 주제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이 육체와 육체의 쾌락에 간섭함으로써 생긴 실제적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다.

홍은영 철학연구소·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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