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획으로 세 후보의 20대를 돌이켜봤다. 대부분의 내용은 그들의 대표 저술을 바탕으로 했다. 다음 호에는 후보들이 현재 20대를 보는 시선에 관해 다룰 예정이다.

대학생으로 시작한 20대
이들의 전공 선택 이유는 평범했다. 문재인 후보는 점수에 맞춰 모두가 꿈꾸는 법대에 진학했고, 안철수 후보는 가업을 잇기 위해 의대에 가기로 결정했다. 박근혜 후보도 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자공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문재인 후보는 학교 다니는 내내 역사과목을 가장 좋아했다. 대학 입시 때도 역사학과를 가고자 했는데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이 반대했다. 성적이 법·상대에 갈 수 있는 등수라는 게 이유였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었는데, 입시 공부를 등한히 한 대가를 치르고, 재수 끝에 경희대 법대에 72학번으로 입학했다.

박근혜 후보는 당시 여학생들이 선호하지 않았던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한 박사가 ‘조그만 트랜지스터 하나가 20~30달러나 하고, 007가방 하나 분량이면 몇 만 달러나 한다. 대한민국은 전자산업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박 후보의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어릴 적부터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아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고 마음이 바뀌었다. 안 후보는 ‘장남이 가업을 잇는다고 하면 부모님이 기뻐하실 것 같았어요. 취미가 직업이 될 필요가 있을까’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기계 만지는 것은 취미생활로 하고자 했다.

유신과 민주화의 양극단에서
1953년생 문재인 후보와 1952년생 박근혜 후보의 20대는 유신 독재체제와 민주화 운동이라는 대척점의 시기에 서있었다. ‘시대는 점점 암울해졌다. 1학년 때,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스물 한 살의 문 후보가 기억하는 1972년 10월이다. 문 후보의 사회의식을 키운 것은 하숙생활이었다. 정치적 통제가 미치지 못하고 대학생들끼리 모여 있으니 밤늦게까지 시국담론을 나누기 일쑤였다. 같은 시기인 1972년 10월, 박 후보는 첫 외교 업무를 시작했다. 박 후보는 어머니 대신 합작회사가 완성한 유조선 진수식에 초대받아 스페인으로 떠났다. 이듬해부터 전국적으로 유신 반대투쟁이 본격화됐고, 문 후보는 3학년 가을, 경희대 재단퇴진 농성을 계기로 친구들과 유신반대 시위를 기획했다. 거듭되는 시위 끝에 결국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수감됐다.

박 후보는 스페인 방문 이후, 하와이에서 열린 ‘한국 이민 70주년 경축 행사’에 참석하는 등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에 나아가기 시작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두 청년은 늘 국가를 생각하고 걱정했지만 ‘위치’의 차이 때문인지 방법은 달랐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문 후보, 외교 전방에 있었던 박 후보와 달리 안 후보의 20대는 사회활동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과거에 채우지 못한 부분을 메우는 듯 얼마 전 전태일 열사와 김근태 의원의 묘소를 참배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지지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 안 후보는 의대생으로 진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정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지금의 아내를 대학 때 만났다. ‘인스턴트 연애’라는 말까지 들리는 요즘 대학생들과 달리 고락을 함께 해온 연인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문 후보는 대학교 3학년 때 법대축제에서 파트너로 아내를 처음 만났다. 아내는 같은 학교 1학년 음대생이었다. 첫 만남 때 서로 호감을 느꼈고, 문 후보가 시위 주동자로 구속됐을 때 아내가 면회를 오기 시작했다. 아내의 품에는 문 후보의 모교인 경남고가 전국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톱기사가 실린 신문이 있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문 후보를 위해 챙겨간 것이다. 문 후보는 ‘세상에 내가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들 구치소에 수감된 처지에 야구소식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 아내가 귀여웠다’며 아내에 대한 살뜰함을 드러냈다. 석방 후 둘은 더 가까워졌고, 아내는 입대 후엔 군대로, 제대 후 고시공부를 할 땐 또 공부하는 곳으로 5년간 면회를 다니며 연애를 이어나갔다. 면회의 역사를 써내려 간 연인은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안 후보는 의대 시절 봉사활동을 하면서 한 학년 아래 여자후배를 만났다. 도전 정신이 강한 아내는 의대 교수 시절 미국으로 떠나 변호사 자격증을 땄을 만큼 안 후보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부부는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고 “(오해와 실수로 첫사랑과 결별하는 스토리에 대해) 우린 저런 힘든 일 안 겪어 다행이다”라고 할 정도로 끈끈한 인연을 감사했다. 아내가 레지던트 1년차 때 첫딸을 얻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박근혜 후보는 1974년에 어머니를 잃고, 5년 뒤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몇 년 새 총탄에 잃고 박 후보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박 후보는 ‘5년 전 어머니의 시신이 눕혀졌던 병풍 뒤에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누가 내 등 뒤에 비수를 꽂는다 해도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당시의 아픔을 회고한다. 박 후보는 9일장을 치르고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옛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정권 차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계속됐다. 18년의 집권기간에 대해 정치적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람들의 매몰찬 배신은 박 후보에게 쓰디쓴 경험이었다.

비슷한 시기, 문 후보도 아버지를 여의었다. 1978년 문 후보가 제대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문 후보와 아버지의 살가운 추억은 그리 많지 않지만 문 후보의 사회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한일회담 등 당시 박정희 정권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했다.

제대한 뒤 졸업도 못해 취업도 못하는 갑갑한 상황에 아버지의 죽음은 문 후보가 마음을 다잡도록 해줬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그냥 취업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늦게나마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했다. 49재를 치르고 다음날 바로 집을 떠나 고시 공부를 위해 해남의 대흥사로 갔다.

책, 그들의 이정표가 되다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그 무렵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이었다.’ 문재인 후보에게 리영희 선생의 논문은 충격 그 자체였다.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과 제국주의적 전쟁의 성격, 미국 내 반전운동 등을 다룬 논문은 후에 <전환시대의 논리>에 실리기도 했다. 미국을 무조건 정의로 받아들이는 당시 사회에 반해, 허위의식을 벗기고자 노력했던 리영희 선생이었다. 문 후보는 리영희 선생을 통해 지식인의 추상같은 자세를 만날 수 있었다.

박근혜 후보는 청와대를 떠나 평범한 생활로 돌아온 뒤 단전호흡과 독서를 하며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 무렵 법구경, 금강경 등 불교경전과 성경을 두루 찾아 읽으며 동양철학 관련 책들과 <정관정요>, <명심보감> 등을 수시로 보았다.

한창 자의식이 강했던 시기, 의대 봉사활동 시절 보았던 가난의 참상은 안 후보에게 사회에 어떤 존재가 될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그때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같은 소설을 읽었는데, 소설보다 현실이 더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절판된 <어둠의 자식들>은 창녀촌, 시장 뒷골목 등의 밑바닥 인생들에 관한 리얼리즘 소설이다. 의대생으로서 어쩌면 사회와 멀리 떨어져있었던 안 후보에게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들은 사회를 바라보는 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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