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이 우리 식탁에서 인기 품목이 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각종 빵과 면의 형태로 한국인들은 1년에 30kg 이상의 밀가루를 소비한다. 쌀 소비량이 급감한 자리를 밀이 채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젊은층의 식단에서 밀은 단연 인기 품목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밀가루를 본격적으로 소비하게 된 것은 미국의 식량원조 프로그램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가 시작되면서 밀은 우리 입맛을 바꾸기 시작했다. 1954년 미국의 “농업무역 및 개발 원조에 관한 법(PL480)”이 발효되어 미국 농산물이 대량으로 국내로 수입된다. 이 법은 미국 농산물의 해외 소비량을 늘리고 대외관계를 향상시키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성적인 잉여 농산물 문제를 해결하고,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해 미국은 PL480을 통해 자국의 농산물을 제3세계로 수출하였다.

대량으로 유입된 미국의 농산물, 특히 밀은 한국사회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하게 된다. 첫째, 값싼 식량이 유입됨으로 인해 국내 농산물 가격을 낮추었다. 이는 도시 서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둘째,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산업화 전략에 기여했다. 1960년대 이후 경공업 중심의 수출지향적 산업화는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는데, 미국산 밀은 저곡가 정책을 통해 노동비용을 낮추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셋째, 장기적으로 한국인들의 입맛을 변화시켜, 국내 밀가루 소비의 지속적 증가를 가져왔다. 소위 ‘밀의 덫(wheat trap)’에 빠지게 되어 1970년대 초 원조가 중지된 이후에도 상업적 무역을 통해 밀가루를 수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농식품사회학의 이론가들인 필립 맥마이클(Philip McMichael)과 해리엇 프리드먼(Harriet Friedmann) 등은 ‘식량체제론(Food Regime Perspective)’을 통해 이러한 역사 과정을 이론화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제2차 식량체제’는 중심부 국가들의 농산물 대량생산 체계가 주변부 국가들의 산업화를 추동하였다는 것이 식량체제론의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였다. 예컨대 1960년대 한국에서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장시간·저임금 노동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서 수입된 밀로 만든 라면 및 국수 때문이었다. 초기 산업화 과정 중 우리가 흔히 겪었던 ‘눈물 젖은 라면 스토리’ 이면에 미국의 밀가루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 밀가루 소비가 증가한 데는 정부와 곡학아세하는 학자들의 역할이 컸다. 쌀밥 중심의 전통식단을 폄하하고, 밀가루를 예찬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운영되었다. ‘식생할 개선’이라는 명목 하에 다양한 밀 소비 증진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분식의 날’이 정해졌으며, 일부 여성단체들은 분식권장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극장에서는 영화 상영 전에 보여주는 ‘대한뉴스’를 통해 밀가루가 쌀보다 영양가가 높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근대화 프로젝트 속에서 밀가루는 서구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빵과 우유가 중산층의 아침식사로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공지영의 소설 <봉순이 언니>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빵이 밥보다 얼마나 영양가가 높은데 그러니? 지금 나라에서도 분식하라고 난린데. 우리보다 잘사는 서양 사람들은 그 좋은 밥 안 먹고 이 빵만 먹는다더라”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식습관이 변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밀가루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라면 산업의 등장이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인스턴트 라면은 일본의 안도 모모후쿠가 1958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역시 미국의 밀을 활용한 아이디어였다. 미군에 의해 구호품으로 풀린 밀을 어떻게 소비할까 하는 일본인들의 고민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일본 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이 1963년 처음 국내에 라면을 출시했다.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혼분식 정책 덕분에 라면의 매출은 급속하게 늘어나 1969년에는 연간 1천 500만 봉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현재 한국인들은 1년에 평균 70개 정도의 라면을 먹는데, 이는 1인당 소비량으로는 세계 1위에 해당한다. 198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중산층의 증가라는 사회 변화 속에서 라면의 의미도 변화하였고, 또 라면 역시 다양화·고급화되었다. 라면은 이제 한국인들의 식탁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그러나 라면 포장지를 보면 면의 원료가 대부분 미국산 혹은 호주산 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밀의 국내 자급률이 1% 남짓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와 국제 곡물가격의 불안정을 고려할 때, 국내 밀 생산량과 소비량의 불일치는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식량 자급률 제고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김철규 문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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