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하나다. <데미안>,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 등 그가 남긴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애독했다. 올해로 그가 서거한지 어느덧 50주년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떠나간 문학가에게서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 한국헤세학회 회장 김륜옥(성신여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헤세 문학의 특성을 살펴봤다.

헤세가 차지하는 문학사적 위치
김륜옥 교수는 “헤세만큼 극단적으로 이중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도 드물다”라고 말했다. 독일 내에서 헤세가 홀대받는 이유는 주로 시대사적 원인에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인 사라예보 사건은 독일 민족에게 “타 민족으로 부터 공격받았다”는 인식을 줬다. 독일의 수많은 젊은이와 지식인들은 전쟁에 찬동했고, 헤세도 전쟁 초기 군대에 자원한다. 하지만 독일의 벨기에 침공으로 전쟁의 성격이 방어에서 침략으로 돌변하자 헤세는 평화주의자로 돌아선다. 당시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던 ‘비주류’ 정신이었다. 헤세는 이를 계기로 독일인의 미움을 받는다.
한편, 독일의 주류 문학담론계에선 헤세를 막고 있던 동시대의 거인이 있었다. 20세기 독일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던 토마스 만(Thomas Mann)이었다. 토마스 만의 문학이 복잡한 외적형태·내적구조를 보였다면 헤세의 문체는 운문처럼 물흐르듯 부드럽고 평이했다. 주류연구계에서 연구 대상으로 보기에 헤세의 문체는 가벼웠던 것이다. 헤세가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을 당시 수상 사유에 토마스만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독일문학계에서 당시 차지하던 그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토마스 만과 함께 동시대 문학에서 독일의 문화유산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작가
- 1946년 헤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수상 사유 중

헤세 문학의 독특성
토마스 만은 ‘독일정신’의 대변자와 같았다. 문학에 드러나는 독일정신은 진리에 대한 진정성, 담백한 진실성, 내면성, 절대가치와 이상을 함축한다. 헤세의 문학 역시 독일정신을 근간으로 하지만 독일에 있어 그는 한명의 ‘탕아’였고 연구가치가 떨어지는 작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이 자국 밖에서 적극 수용된 것은 이런 특성 때문이었다. 독일정신을 바탕으로 평화를 부르짖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인류의 보편적 휴머니즘으로 승화됐고 부드러운 문체와 함께 헤세 문학에 포용성을 부여했다. 특히 괴테 이후 독일문학의 주요테마인 자아탐색, 개인과 사회의 갈등 등이 헤세의 진실한 체험 속에서 그려지면서 히피와 젊은이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호응을 얻게 된다.

사실 시민 사회의 왕성한 활력은 결코 보통 시민들의 특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 사회가 이리저리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애매한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내부에 품을 수 있는 수많은 국외자들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시민들 속에는 언제나 거칠고 강인한 본성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우리의 황야의 이리 하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민음사 <황야의 이리> p.76

헤세 문학의 주제 의식
헤세 문학의 주요 소재는 젊은이들의 정신적 성장이다. 이해되지 않는 삶, 생의 비밀과 모순, 세상의 원리에 대한 인식에 목마른 젊은이가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헤세 문학에서 나타난다.
헤세는 문학에서 선과 악, 참됨과 거짓됨,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해 공존의 원리를 파악하려 했다. <데미안>에서 절대자 압락사스는 단지 ‘선’의 화신이 아니라 ‘선’과 ‘악’의 집합체로서 궁극적인 ‘선’을 구현한다. 선과 악의 공존을 인정하는 원리는 곧 타인, 세상, 존재를 극단의 잣대에서 초월해 진정으로 인식하고 긍정하는 원리와 같다.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헤세에게 이 과정은 혼돈의 연속이다. 대부분 자전적 성격을 띠는 헤세 문학의 기조는 이 혼돈 끝에 다듬어져가는 영혼의 소리다.

싱클레어,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 어떤 어마어마한 불결한 짓을 저지르고 싶거든, 한순간 생각하게. 그렇게 자네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압락사스라는 것을! 자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할 뿐이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 민음사 <데미안> p.152

헤세 문학의 철학적 바탕
김 교수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C.G.융(Carl Gustav Jung)’, 동양 사상 등이 헤세의 문학관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헤세 문학에 드러나는 통념의 초월은 니체의 상대주의적 진리관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또 융은 ‘집단 무의식’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전달되는 상상, 두려움, 욕망이 ‘진정한 자아’로 향해가는 ‘인간화’ 내지 ‘개체화과정’을 설명했는데 이는 <데미안>의 창작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헤세는 인도 사상을 비롯해 부처, 노자 등 동양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헤세 작품 <싯다르타>에는 역사적 실존인물인 부처를 표현한 ‘고타마’와 부처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구도를 추구하는 가공의 인물 '싯다르타'가 등장한다. 김 교수는 “싯다르타는 노자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서구적 사상은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언어를 통한 진리의 규명 등 선(線)적인 사고다. 반면 노자의 사상은 원(圓)적이다. 노자 사상에서 세상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 구름이 되고 다시 비 내려 강을 이루듯 하나의 변화다.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 민음사 <싯다르타> p.210

현 시대에 주는 헤세의 메시지
성별, 연령과 무관하게 ‘삶의 진실’에 의문을 품고 나름의 해답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헤세는 위로와 용기를 준다. 특히 무한경쟁 시대에 거짓된 삶의 주문에 떠밀려 스스로 살기를 거부하는 청년들에게 헤세의 작품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것을 요구한다. 김 교수는 “사람들이 헤세를 읽는 것은 헤세가 삶의 진실에 대해 특정한 해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든 삶의 진실에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도록, 자의식을 가져보도록 자극하며 몸소 매우 구체적인 하나의 삶의 모델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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