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마리아릴케와 루살로메의 관계처럼 위대한 예술가의 옆에는 때때로 특별한 조력자가 있었다. 한국헤세학회는 창립 20주년 및 헤세 서거 50주년을 맞이해 10월 20일 기념학술대회를 열었다. 박정희(상명대 독일어문학과) 교수는 ‘헤세의 마지막 연인 니논 헤세의 삶’이란 주제로 ‘니논 헤세(Ninon Hesse)’의 삶을 조명해봤다.  

헤세는 세 명의 여인과 결혼 생활을 했다. 이 중 헤세와 말년을 동행한 마지막 부인이 니논이다. 니논이 처음 헤세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10년이다. 1909년 친구로부터 헤세의 저서 <페터 카멘친트>를 선물받은 니논은 15세인 1910년 헤세에게 편지를 보냈고 짧은 답신을 받는다. 이후 니논은 12살 연상의 삽화가와 첫 번째 결혼을 하지만 외적인 화려함에 그쳤던 결혼생활은 그녀의 자아 확장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곧 서먹해진다. 자신의 결핍된 결혼생활을 채우기 위해 그녀가 택한 것은 헤세였다. 1922년, 니논은 첫 편지를 교환한지 12년만에 처음 헤세와 만나게 되고 지속적인 편지교환으로 정서적인 교감을 나눈다.

두 콤플렉스의 만남
박정희 교수는 니논과 헤세가 각각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니논의 아버지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교양인으로 그녀에게 평생의 모범과 우상이 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후 그녀가 비교적 높은 연배를 만나는 것도 일종의 대리만족에 가깝다.
헤세의 아버지는 엄격한 목사였다. 헤세에게 남부 슈바벤 지방 특유의 경건한 분위기와 억압적인 기독교 전통은 정신적인 위기를 불러왔다. 그에게 어머니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헤세는 어머니에 대해 “그녀는 내 오랜 삶의 정열적이지 못하지만, 가장 강력하고 고결한 사랑이었다”라고 말했다.

흠모자에서 조력자로
18살 연하인 니논의 적극적인 접근으로 시작된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니논의 ‘봉사와 희생’이었다. 1927년 계약동거를 맺을 무렵, 니논의 역할은 눈이 불편한 헤세에게 책읽어주는 여자에 불과했다. 함께 책을 읽지만 잠자리를 하지 않았고 결혼식 후 신혼여행도 니논 홀로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럼에도 헤세를 열렬히 흠모했던 그녀는 “제대로 함께 산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를 원할 때 거기에 있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특히 상대방이 자기를 원하지 않을 때 거기에 없어 주는 데에도 있다”고 한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불균등했고 니논은 더 많은 희생 속에서 괴로워했다. 헤세의 아이를 갖고자 열망했지만 갖지 못했던 그녀는 헤세의 첫 번째 부인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푸념하기도 했다. 니논의 이런 모습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가의 보조자로 살아야할 운명을 지닌 아내, 연인의 일면인지도 모른다. 

헤세는 니논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지독한 고독과 우울증, 자살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번째 결혼이 파국으로 치달을 무렵 집필한 <황야의 이리>는 삶에 대한 혐오와 자아에 대한 회의 속에서 쓰여졌다. 두 차례의 이혼 이후 고독감 속에서 황폐화됐던 헤세는 니논의 헌신 속에 안정을 되찾아갔다. 결혼 이후 집필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동방순례> 등의 작품에서 헤세는 존재의 균형을 찾아간다. 특히 만년의 역작 <유리알 유희>는 니논과의 동반자적 삶이 시작되고 난 후 11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소설이다. 니논은 헤세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헤세 사후 4년 뒤 1966년, 니논은 71세의 나이로 헤세를 따라가며 자신의 일기장에 마지막 문구를 남긴다. “그와 나는 하나였다. 그의 죽음은 나를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나는 남아있는 절반이었다. 피를 흘리는 절반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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