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에서 드러난 루소의 교육관은 ‘자연주의 교육’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루소는 정말 바람직한 교육을 위해 에밀을 지었을까? 본교 교육문제연구소 강성훈 연구교수는 이런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며 소수 의견을 제시한다. 강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에밀>에 대한 대안적 독해를 살펴봤다.

<에밀>에 대한 주류 해석
루소의 <에밀>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사회계약론>과 동시에 출간됐다. 때문에 많은 지식인이 <에밀>과 <사회계약론>의 연관성을 추론했다. 특히 18세기 이후 독일 사유의 전통 속에서 <에밀>은 사회개혁을 위한 교육서로 여겨졌다. 칸트는 <에밀>을 “사회계약을 위한 자유인의 양성법”으로 해석했고 이는 현재까지 주류 해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강 교수는 <에밀>을 “교육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당대의 시도를 지적하는 비판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받은 인간의 비극적 선택
루소는 <에밀>에서 ‘자신만을 위한 교육을 받은 아이가 사람들 앞에 나가면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주인공 에밀은 혼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성공적으로 교육받지만 루소의 의문은 미완인 채 끝난다. 이에 대한 답은 후속작인 <에밀과 소피>에 나타난다. ‘소피’와 결혼한 에밀은 파리로 이주한다. 하지만 곧 ‘파리의 악덕에 오염된’ 소피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자 충격을 받은 에밀이 가정을 떠나 각지를 떠도는 것으로 <에밀과 소피>는 끝난다. 루소의 지인들이 미완인 ‘에밀’의 미래를 묻자 루소는 에밀이 소피를 용서하지만 사회와 격리된 고립무원의 공간으로 함께 떠난다고 답한다. 

<에밀>의 메시지
루소는 지금까지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된 사회가 없기에 앞으로 사회계약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대의 사회가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됐다고 가정하는 홉스, 로크 등 여타 사회계약론자와의 차이점이다. 에밀의 배경은 사회계약 이전의 사회다. 루소는 에밀을 통해 사회계약 이전의 사회에서 가능한 최선의 교육을 실험한다. 하지만 끝내 고립무원으로 떠나듯 사회계약 이전의 사회에서 인간은 최선의 교육으로도 결코 사회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 강 교수는 “애초에 루소는 교육을 통한 사회의 변화라는 당대의 화두에 회의를 품었다”고 말한다. 결국 루소가 ‘사람들 앞에 나가면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고립무원으로 은거하는 결말을 제시한 것은 사회계약이 선행되지 않은 교육은 의미가 없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모순적 장치다.

인간 성선에 대한 오해
<에밀>의 서두는 일반적으로 “신은 만물을 선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모든 것에 손을 대어 선함을 잃게 만든다”고 번역된다. 만물이 선하게 창조됐기에 선한 인간 자연성을 찾는 ‘자연주의 교육’이 정당화된다. 하지만 이는 코메니우스 적 관점에서 윤색된 것일 뿐, 루소는 자연주의 교육도, 인간의 성선에 대한 언급도 한 적이 없다. 강 교수는 “이는 루소 교육관에 대한 선입견이 부른 오독(誤讀)일 뿐”이라고 말한다. 위 문장에서 ‘선하게’의 프랑스 원어는 ‘bien’이다. ‘bien’은 일반적으로 ‘선하다’와 ‘좋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bon’ 역시 ‘선하다’와 ‘좋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루소는 전 저서에서 ‘bon’을 도덕적 선함을 표현할 때 사용한 반면 ‘bien’을 ‘좋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강 교수의 독법에 따르면 “신은 만물을 좋게 만들었다”로 해석돼야 한다. 여기서 ‘좋다’는 것은 ‘좋은 상태’,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즉, 루소는 “신은 만물을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었다”라고 언급할 뿐, 선악 관념을 논의의 중심에 둔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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