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유교적 전통은 ‘옛것’이 돼 버렸다. 19세기 말 서양 신문물에 놀란 많은 지식인들은 서구적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서둘러 전근대에 대한 정화의식을 치뤘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유교는 고리타분한 과거의 가치로 점차 그 영역을 잃어가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유교가 꿈꾼 사회는 무엇일까. 유교는 어떻게 그토록 오랜시간 동양을 매혹시킬 수 있었을까. 유교문화연구원장 최영진(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유교의 세계를 살펴봤다.

위민(爲民)의 정치
최영진 교수는 “공자의 정치는 ‘위민’의 정치”라고 말했다. 진(秦)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기 이전, 중국은 전란과 군주의 폭정으로 혼란스러운 사회였다. 군주는 민중을 형벌과 법령으로 통치하며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공자는 폭력을 기반으로 민중을 착취하는 당대의 정치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공자가 생각하는 정치의 목적은 ‘민(民)을 위함’에 있었다. 군주 개인을 위한 국가가 아닌, 민을 위한 공동체라는 공자의 이상 속에서 유가(儒家)가 탄생했다.

권력의 분산
유가는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를 꿈꿨다. 하지만 공동체 속에서 권력은 필연적으로 뛰어난 소수에게 집중된다. 이런 현실적 인식 위에서 유가는 권력이 사(私)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통제할 방법을 찾았다. 유학이 한 무제에 의해 관학으로 정착하자 유학자 동중서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견제하는 이중 장치를 만든다.
권력의 분산은 조선조에 두드러진다. 사대부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과 충돌 속에서도 군신공치의 국가를 설계했다. 이후 조선 사회에서 권력은 끊임없이 분화했다. 권력은 세조까지 왕권으로 이후에는 신권으로 이어지며 훈구파, 사림파, 북인, 남인, 서인, 노론 등의 분화를 거듭하다 다시 정조의 탕평정치로 균형을 이룬다.

도덕적 자율성
전국시대 열국에는 법가(法家)가 유행하고 있었다. 법가는 형벌과 법령 등 엄격한 법치로 공동체를 다스렸다. 하지만 유가는 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제도적 장치는 한계가 있다. 외적인 장치가 치밀히 구성돼 있다고 해도 권력을 갖는 개개인이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 한 빈틈을 파고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법가에 대해 무엇보다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최 교수는 “공자는 법치가 도덕 감정을 마비시킬 것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법령정치로서 백성을 이끌고, 형벌로서 백성을 억제하면, 백성들은 형벌을 모면하려고만 하지 부끄러워함은 없다. 그러나 덕치로서 백성을 이끌고, 예로서 백성을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 할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를 바로 잡는다.”
-<논어> ‘위정’편
인간에게는 선험적인 도덕 감정이 있다. 하지만 제도가 그것을 대체하려 하면 인간은 타율성에 기대 본래적 도덕 감정을 잃게 된다. 즉, 악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때문에 공자는 ‘법’보다 ‘덕’을 앞에 두고 사회의 보편적 규범인 ‘예’로서 부끄러움을 일깨우려 했다. 

하늘을 닮고자
사람은 왜 선험적 도덕을 추구해야 할까. 최 교수는 “그 이유는 유가가 천(天)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천이란 천도(天道)를 의미하며 천도는 자연을 통해 드러난다. 중용은 ‘하늘이 부여해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고 말한다. 유가는 이런 존재론을 기반으로 마땅히 선한 본성을 따라야 함을 강조한다. ‘천도’에서 공동체의 규범을 도출하기 때문에 이는 권위를 갖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면 모두가 구해주려 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말했다. “사람은 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불인인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본다면 모두 깜짝 놀라서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이니, 이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교을 맺으려 하는 까닭도 아니며 마을 사람과 친구들에게 칭찬을 들으려 하는 것도 아니며, 나쁜 소문이 날까봐 그것을 싫어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맹자> ‘공손추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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