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을 넘게 한 건 '등산자체의 행복' 때문이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게 한 건 '등산자체의 행복' 때문이었다"
  • 홍지일 기자
  • 승인 2013.04.07 0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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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산악인 오은선(교육대학원 체육교육과) 대장 인터뷰

▲ 여성 산악인 오은선(교육대학원 체육교육과) 대장

언젠가부터 ‘히말라야’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우리나라에도 히말라야의 정상을 오른 이들이 늘었지만 대부부분은 남성이다. 그래서 여성으로 8000m가 넘는 봉우리 14개와 7대륙의 최고봉을 밟았다는 기록은 대단하게 느껴진다. 세계최초 ‘여자’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기록한 오은선(교육대학원・체육교육과) 대장을 만났다.

   여성으로서 전문산악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남자들조차 도전하기 벅찬 꺼리는 고지대의 산을 오르는 것은 더욱 그렇다. 도대체 산의 어떤 매력이 그녀를 전문산악인으로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녀를 히말라야로 발길을 이끈 것일까.
- 학창시절부터 산과 인연이 있었나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산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북한산에 오르곤 했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는 산악부에 가입해 산악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산악은 단순한 ‘취미’였다. 히말라야에 가는 사람들을 막연하게 동경했을 뿐, 정작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산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던 학생이었다”

- 히말라야에 가게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할 때, 히말라야에 등반할 여성대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막연하게 히말라야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원했는데 어찌하다보니 최종적으로 선발이 됐다”

- 처음 히말라야를 맞이했던 기억은 어떤가
“그 당시엔 정상까지 가는 것이 아니고, 히말라야란 곳을 느낄 수 있는 정도로만 등정했다. 그럼에도 5000m의 고지대를 처음 접하다보니 고생을 많이 했다. 고산병에 걸려 머리도 아프고, 몸에 힘도 없었다. 하지만 산악인들이 소위 ‘신들의 영역’이라고 하는 히말라야를 밟아봤다는 기쁨이 고지대에서 고생했던 순간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히말라야와 7대륙 봉우리를 모두 등정해본 오은선 대장은 자신의 등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등반을 하며 생긴 여러 에피소드를 물어봤다.
- 8000미터 이상의 봉우리를 등반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히말라야에 가기위해 정말 많은 훈련을 했다. 그 중에서 ‘지리산 무박종주’ 훈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틀 밤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지리산 정상으로 가는 훈련인데, 오를 때는 남녀 구분없이 30kg가 넘는 가방을 짊어져야했다. 훈련이 힘들어 걷는 자세로 잠을 자는 동료들도 있었다”

- 산소부족에 적응하기 힘들진 않았나
“우리나라엔 히말라야만큼의 고지대가 없기 때문에 고산병에 적응할 훈련을 하기가 힘들었다. 두통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물을 많이 마시는 방법만이 최선이었다. 그만큼 힘들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8000m이상의 봉우리를 무산소로 등정하면 ‘무산소등정’이라는 기록을 준다”

- 위험한 순간은 없었나
“1997년에 같이 등반하던 대원이 히든 크레바스(눈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 골짜기)에 빠져 구출된 적이 있었다. 언제 누가 빠질지 모르는 크레바스 때문에 긴장의 끈을 늦출수가 없다. 그리고 2004년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엔 정상에 오르는데 산소통을 모두 써서 하산 길에 산소부족으로 큰 위기가 왔었다. 당시만 해도 무산소 등정에는 익숙치 않았기 때문에 산소가 없었던 에베레스트 하산 길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봉우리는
“7대륙 등정 중 갔던 북아메리카 최고봉 메킨리였다. 메킨리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기 전 시험무대였다. 2003년 당시 ‘내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어 메킨리 등정으로 자신감을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메킨리에 도착하니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메킨리 시티부터 메킨리를 등정하는 여정, 그리고 정상까지 모두가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아직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난해 그 느낌을 받고 싶어 메킨리를 다시 다녀왔다”

   오은선 대장에게 다가온 시련은 14좌 완등 과정 중이 아니었다. 오 대장은 ‘칸첸중가 등정논란’ 이후에 큰 상처를 받고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려했다고 한다. 논란이후 지난 3년 간의 시간동안 그녀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 ‘칸첸중가’ 등정논란이 생긴 이후 3년이 지났다
“당시에 방송을 보고 너무 많이 상처를 받았다. 할 수 있는 인터뷰를 다 했는데도 자꾸 해명을 요구했다. 세르파의 인터뷰를 악의적으로 편집하고 왜곡하는 언론에게 더이상 해명하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져 대응하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다시하라’고 말했는데 산에 가는 것을 ㅇ특정 목적보다는 즐기기 위해 갔던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음의 문턱을 가는 이유는 명예 때문이 아니다. 산에 가는게 행복해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 요즘 근황은 어떤가
“대학졸업 이후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를 해보고 싶은 생각에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정말로 배우고 싶은 공부를 찾다가 지금은 대학원에서 여가와 관련한 전공을 듣고 곧 논문통과를 앞두고 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레크리에이션과 관련한 일을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 새로운 목표를 갖는 대학생들을 위해 조언을 한다면
“고대 산악회에서 전문산악인을 꿈꾸는 대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산악부 학생들에게 ‘반드시 도전의식을 가지고 목표를 세우고 실천을 하라’고 말한다. 실천하려는 노력은 몇 년이 지나서라도 반드시 보상받는다. 또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즐기면서 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이렇게 봐주겠지’가 아니라 정말로 자기가 즐기면서 자신에게 자부심도 가질 일을 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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