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 인문대 교수 사회학과

   2011년 봄 스페인에서 한 학생을 만났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마드리드 시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였다. 나는 뭔가 글을 쓰고 있는 한 학생에게 “요구 사항이 뭐냐”고 물었다. 정부 교체나 일자리를 요구하는지 궁금했다. 앳된 얼굴의 그 학생은 “우리는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기를 원한다”고 답했다. 세계를 휩쓴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의 손에도 해법은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다는 불만의 목소리를 터뜨렸다.

  얼핏 보기에 한국 대학생은 조용히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이슈가 터지고 사회 양극화가 심각해도 불만의 목소리가 사회를 흔들지 못한다. 과연 대학생의 사회적 관심이 사라졌는가? 분명 오늘날 대학생은 성적, 취업 등 개인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투표율은 낮고 사회적 발언을 하는 학생들은 소수화되었다. 그 와중에 ‘힐링’이 대세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먼저,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학생의 정치적 역할이 약화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에서 거대한 산업예비군으로 변한 현실을 지적할 수 있다. 대학도 비판적 지성이 아니라 인력 양성의 공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둘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장과 경쟁을 강조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대학도 개인의 성과를 중시하는 문화를 급속하게 수용했다. 상대평가제로 친구는 경쟁자로 변질되었고, 우정보다 ‘스펙’이 미덕이 되었다. 확실히 대학에서 공적 영역은 약화되고 있다.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개인화한 개인들로 인해 공공영역이 사라지는” 현실을 우려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해방이 (그들을) 사회에 무관심하게 만들 것”이라는 19세기 알렉시스 토크빌의 경고와 맞닿아있다. 그러나 바우만이 말한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진화의 결과이거나 불가피한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를 움직이는 세력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많은 경우 사회적 무관심은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 정당과 언론의 엘리트에 의해서 조작되고 강요되고 있기도 한다. 정치인은 자기이익에 몰두하고, 미디어는 사회문제의 탐사보도 대신 연예와 오락으로 광고 따기에 바쁘다. 기업은 시민을 수동적인 시청자와 소비자에 매몰되도록 더 많은 돈을 쓴다. 미국 정치학자 셀던 윌린이 말한대로 ‘관리된 민주주의’에 살고 있는 시민은 사실상 대표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무관심은 매우 불안한 현상이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젊은이들의 사회적 관심이 자신을 대표하지 않는 정당 대신 사회운동의 ‘하위정치’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에서도 정치는 더러운 용어가 되었지만 2008년 촛불시위처럼 학생들은 폭발적으로 거리에 나설 수 있다.

  민주주의 발상지 아테네의 시민은 누구나 사회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반면에 사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이디오테스’라고 불렀다. 바보라는 뜻을 가진 영어 ‘이디어트’의 어원이다.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사악한 어둠의 세력과 맞서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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