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에는 이걸 그려서 황당한 소리 한다고 욕 많이 들었어요.” 37년 전, 만화로 2000년대를 예측한 고대신문 만화기자 이학영(중어중문학과 74학번) 교우가 말했다. 1977년 11월 3일 고대신문 창간 30주년 기념 794호 기사 중 ‘고대신문을 통해 본 석탑사회, 그 과거와 미래의 자화상’에서 예측한 2000년대 모습을 현재와 비교해봤다.

▲ 이학영 교우가 그린 고대신문 창간 30주년 기념 지령 794호 만화 중 일부

 세계화에 대한 열망
▲ 이학영(중어중문학과 74학번) 교우사진 | 이종은 조아영 기자

  지금 보면 가장 그럴 듯한 세계화에 관한 예측은 당시에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만화를 보면 각각 흑인과 백인으로 보이는 유학생이 ‘나가자 폭풍같이’를 외치며 지나가고 있고 이들을 보고 있는 여학생이 ‘우리 과에 유학 온 아프리카 학생인데 막걸리 귀신이야’라며 친구에게 말하고 있다. 이를 그린 이학영 교우는 “당시 교내에서 볼 수 있는 외국인은 아주 적었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어를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며 “‘나가자 폭풍같이’는 지금의 ‘민족의 아리아’만큼이나 유명했던 응원가 가사”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특히 당시 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인식은 식인종, 미개하다는 정도였다”며 “이를 보고 친구들이 거짓말을 해도 이런 거짓말을 하느냐며 핀잔을 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제처에 따르면 2014년 1학기 기준 가나, 나이지리아 등 본교의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은 44명에 달한다.

  수업에 늦게 들어 온 학생이 교수에게 ‘미국을 답사하고 오느라 개학에 늦었다’고 말하는 모습을 표현한 부분도 있다. 이에 이 교우는 “당시 여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부의 상징일 정도로 외국을 나간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며 “오늘날과 같이 학생이 방학 동안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며 웃었다.

 기술발전에 대한 기대
  반면 고려대 전용 로켓을 통해 달에 세워진 분교에 간다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는 오히려 비판받지 않았다고 한다. 만화를 보면 ‘고대 전용 로켓’에서 ‘안암우주기지를 출발한 여러분은 지금 월세계(달나라) 분교로 향하고 있읍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인류가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찍은 것은 1969년 7월이었다. 이후 10여 년간 미국과 소련은 우주 정복을 위해 경쟁했다. 관련 기술과 과학이 급진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이학영 교우는 “70년대 대학생들은 이렇게 급진적인 성장이 계속된다면 30년 후는 당연히 달나라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며 “당시엔 오히려 욕을 듣지도 않았고, 그렇게 황당하지도 않은 소리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우는 “분교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것”이라며 “분교가 생길 것이라는 예측은 들어맞았다”며 흡족해했다.

 고려대에 대한 바람
  이상적인 고려대의 모습을 담은 예측도 있었다. 만화의 우측 상단엔 스케치북을 든 학생이 ‘고대에 음대, 미대, 약대가 생기니까 더욱 돋보이는걸’이라고 말한다. 1977년 본교에는 미술교육과만 있었을 뿐 미대, 음대와 약대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학영 교우는 “고려대가 진정한 종합대학으로 거듭나며 다양한 학부가 신설될 것이라고 예상했다”며 “2000년대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10년 안에 음대, 미대, 약대가 신설될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예상이 하나 둘씩 맞아들기 시작했다. 2000년 사범대 소속이었던 미술교육과는 미술학부로 독립했고 2007년에 조형학부, 2011년 디자인조형학부로 명칭을 바꿨다. 약학대 또한 2010년 세종캠퍼스에 신설됐다. 2010년 2월 교육과학기술부가 고려대 세종캠퍼스를 충남지역 약학대 설치 대학으로 최종 선정했고, 본교는 2011년부터 약학대 신입생을 선발했다.

  현재 개설되지 않은 것은 음대뿐이지만, 최근 작은 변화가 생겼다. 10월 본교는 10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음악 전임교수를 초빙했고 류경선(교양교육실) 교수가 선발됐다. 음악 관련 학부가 없는 대학에서 음악 전임교수를 둔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번 결정에 대해 명순구 교무처장은 “계속해서 축소되는 교양교육, 그중에서도 예술교육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변화”라고 말했다.

 유신시대의 아픔이 투영된 소망
  1977년은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 자유가 제한돼 있던 시대였다. ‘생막걸리 한 잔 할까’라고 말하며 막걸리를 따르는 만화엔 ‘깨끗한 쌀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는 당시 학생들의 생각이 담겨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쌀 부족 문제를 줄이기 위해 보리혼식을 장려했고, 1964년부터 막걸리 주조에 쌀 사용이 엄격히 금지됐기 때문이다. 쌀 막걸리가 전면허용된 것은 박 대통령 사후의 일이다. 이학영 교우는 “만화에 쓴 ‘생막걸리’라는 단어는 화학성분 없이 쌀로 만든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는 뜻을 담은 것”이라며 “만화를 보고 많은 학생들이 이건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열띠게 외치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기자의 ‘자체 검열’로 실리지 못한 만화도 있다. ‘고대에 음대, 미대, 약대가 생기니까 더욱 돋보이는 걸’이라고 말하는 만화 옆, ‘졸업하기 싫다’며 울고 있는 학생이 ‘자체 검열’의 잔재다. 사실 이학영 교우가 음대, 미대, 약대 신설 칸에 그렸던 만화는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자유롭게 말하는 대학생 토론회’에 관한 내용이었고, 우는 학생은 자유로운 표현이 보장되는 대학을 떠나고 싶지 않은 심정을 대변한 것이다. 이학영 교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검열 후 삭제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결국 처음 그렸던 만화를 지워야 했다”며 “정부가 검열하기 전에 ‘자체 검열’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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