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시공간의 예술(art)이다. 미래로 열린 과거를 오늘의 독자에게 보여준다. 1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삶을 담는다. 신문, 방송, 인터넷 언론이 모두 그러하다. 기사는 근본적으로 시간 그리고 공간에 대한 것이다. 좋은 기사를 결정하는 변수는 두 가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제대로 녹였는가. 얼마나 광대한 공간을 적절하게 담았는가.

 창간 67주년을 맞은 <고대신문>의 최근 변화는 언론의 본디 자리를 향한 진일보다. 시공간을 제대로 응축하려 하고 있다. 1980년대, 그리고 90년대의 대학언론이 한때나마 사회 전체의 ‘대안 언론’으로 여겨지던 시절, <고대신문>은 캠퍼스를 매개삼아 캠퍼스 바깥의 세상을 다뤘다. 어제의 일이 아니라 지난 반세기를 다뤘다. 대학에 투영되는 구조와 역사를 다뤘다. 풍부한 시공간의 맥락 위에서만 ‘사실’은 ‘진실’로 승화한다는 것을 그 시절의 <고대신문> 기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을 흉내 낼 필요는 없지만, 그 파토스를 계승할 필요는 있다. 열정은 교감에 대한 갈망이다. 무언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그 헌신의 끝에 다가올 성취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다. <고대신문>은 교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언론이 되기를 모의하는 사람들의 둥지여야 한다.

  결국 독자가 언론에게 원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그 정보가 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맥락’이다. 복잡하고 중층적인 맥락은 시간과 공간의 축을 엮어내는 심층보도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대학이 대학생에게 대학다운 교양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시대, <고대신문>은 진짜 대학이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입증해 보이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마도 그것은 기성 언론의 기자들에게도 적용될만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지금 지쳐 오직 관성에 기대 있을 뿐이다.

  언론의 희망은 <고대신문>에 있다, 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디에 가닿게 될 것인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응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길을 응원한다.






안수찬
<한겨레> 기자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