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모작 중에서 홍영준의 「별길」이 가장 돋보였다. 세련되었다거나 완성도가 높았다는 뜻이 아니다. 습작기 문학청년의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반듯한 기성품을 기대할 순 없는 법이다. 이 소설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직접 타격하는 몇몇 중요한 미덕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따금 발견되는 거친 문장이나 통속적인 표현들이 무난히 변호될 정도로 「별길」에 담긴 정조들은 깊고 진지하다. 그러나 제일 빛나는 주인공은 그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매끄럽고 탄탄한 각 정조들의 연쇄라 할 것이다.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떠남 vs 남음’의 구도가 중반 이후 ‘외로움’으로 서서히 수렴되는가 싶더니, 결말 부분에 이르면 별이 빛나는 우주의 풍경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구도는 삐딱하게 보자면 무슨 공식 같기도 하다. 이른바 ‘신춘문예용’이라 부르는, 작고 특수한 사건을 거론한 뒤 인간 본성을 은유하는 결말로 귀납하는 서사의 성공방정식 말이다. 한 가지 함정은 그 성공방정식을 사용해 실제로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홍영준의 「별길」은 방정식에서 자기 값을 취하는데 성공했다. 떠나는 자도 남는 자도 모두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말하지만, 이를테면 복권을 구입한 아비의 일화처럼, 매끈한 마디 어디쯤에서 불쑥 튀어나와 독자의 상상과 어우러져 명멸하는 작고 사소한 공백들이 그 자명함을 핍진함으로 견인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흔한 미덕이 아니다. 문득 이러한 미래서사가 떠오른다. 엉성하게 제시된 뼈대에 개별 독자 스스로가 이야기의 살을 붙이는, 말하자면 작가와 독자가 나누는 대화로서 구축되는 이야기. 독자 스스로의 마음결로 지어졌기에 독자의 민낯을 그 무엇보다도 섬세하게 묘파할 수 있는 이야기. 읽어나가는 동공의 떨림에 맞춰 이리저리 제 형태를 바꿔나가는 이야기. 혹시 이 소설이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어쩌면 그런 기적도 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구의 법칙을 처음 배웠다. 이 행성에서는 누구도 원하는 만큼을 가질 수는 없다고.”

  이처럼 아픈 문장을 자기 손끝으로 직접 매만져본 이는 떠날 수 없다. 아무리 멀리,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더라도 결국엔 문학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동안 건강 잘 챙기시길 빈다.

박형서
인문대 교수·미디어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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