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장지희 기자 doby@

“학교에 대해 고마움은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꼭 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멀리 돌아왔네요.”
이천수(체육교육과 00학번) 선수가 후배들을 위해 4일 본교에 발전기금 1억 원 기부를 약정했다. “바쁜 나날을 보내며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기부를 이제야 했네요. 대학 시절은 물론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도 여러 선배로부터 따뜻한 마음을 많이 받았어요. 저 역시 후배들에게 선배의 마음을 담아 격려하고 싶었죠.”
이천수 선수는 차두리(신문방송학과 99학번) 선수, 박주영(체육교육과 04학번) 선수 등과 함께 본교 출신의 대표적인 축구 스타다. 누구보다도 굴곡 있던 선수생활을 뒤로한 채 새로운 축구 인생을 살고 있는 이천수 선수를 만났다.
대학 시절 주목받던 축구 천재
이천수 선수는 새내기 시절부터 그 싹이 남달랐다. 그는 1학년 때 처음 출전한 고연전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골을 기록하며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저를 수비하던 송종국 선수를 포함해 서너 명의 수비를 제치면서 70m 정도를 돌파했어요. 그러다 마지막에는 상대 골키퍼였던 김용대 선수까지 제치고 골을 넣었죠. 골을 넣자마자 응원단상에 뛰어 올라가 함께 뱃노래를 불렀어요. 물론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요(웃음). 결국, 그 경기는 2:0으로 이겼어요.”
이천수 선수는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국가대표팀은 물론 청소년대표팀, 올림픽대표팀에도 소집돼 사실상 학교생활을 하기는 힘들었다. 이런 사정 탓에 국가대표인 그가 수강과목인 축구 수업에서 C+를 받는 일도 생겼다. “실력만 제대로 발휘했으면 당연히 A+를 받았겠죠. 하지만 시합 때문에 바빠서 수업을 못 듣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요. 사실 C+도 교수님이 저를 예뻐해서 주신 것 같아요.”
화려한 성공 뒤엔 수많은 좌절이
마냥 화려해 보이는 그의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는 그리 유복하지 않은 가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천수 선수는 고등학교 졸업 당시 하루빨리 돈을 벌기 위해 대학 대신 프로진출을 희망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솔직히 가정 형편이 어려웠어요. 대학에 가고 싶기도 했지만, 이제는 가족도 생각해야겠다 싶어 프로에 가려고 했죠.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고려대에 진학했어요. 지나보니 아버지 말씀을 들었던 것에 후회는 없어요.”
그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3년 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하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됐다. 하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약 2년 만에 국내로 복귀했다. 2007년에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로 진출했으나 이듬해 국내로 복귀했다. 한국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던 그가 해외에서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 단 한 골도 못 넣었어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포기가 다소 빨랐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나라에서 단기간에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거든요. 당시에는 저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판단을 했는데 그 부분이 아쉬워요.”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목받은 그는 우여곡절 심한 축구인생을 보냈다. 청소년대표에서 국가대표까지 소위 엘리트코스를 거친 그는 2002년 월드컵을 통해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여러 불미스런 사건으로 한동안 지탄을 받기도 했다. “제 선수 생활은 참 굴곡이 많았어요. 좋을 땐 정말 좋다가 나쁠 때는 바닥까지 떨어졌죠. 하지만 저는 결국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정말 웃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서른다섯의 나이에도 운동을 하고 있고, 제가 공을 놓을 때까지는 항상 최선을 다할 거예요.”
이제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숱한 좌절과 고비를 넘긴 그는 이제 고향팀인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후배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인천에서 세 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 그는 선수보다 팀을 강조했다. “모든 선수가 하나가 돼야만 팀이 1부 리그에 계속 남을 수 있어요. 후배들이 저를 본받도록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는 14년간의 프로생활을 통해 축구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제가 골을 넣으면 팀이 져도 괜찮았어요. 그래도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개인적인 욕심보다 팀이 이기는 것이 우선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뛰다 보면 개인적으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머릿속에는 오직 축구뿐”
이천수 선수는 2000년대 중반 대한민국 축구의 에이스로서 대체 불가능한 선수였다. 2006년 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 토고전에서 기록한 프리킥 골은 이천수 선수가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하는 골이다. “원래 프리킥 골을 좋아해요. 모든 사람이 제 발끝에 집중하고 있다가 한 번에 환호가 터지거든요.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얼마나 많은 국민이 지켜보고 있었겠어요. 지금 그 순간을 다시 상상해도 엄청난 희열을 느껴요.” 하지만 그는 어느새 8년째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국가대표에 대한 욕심은 아직 남아있을까. “아직 현역이기에 국가대표에 대한 욕심은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의 국가대표 생활을 잘 마무리할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죠. 기회만 주어진다면 목숨 걸고 뛸 자신이 있어요.”
그는 선수에서 은퇴하더라도 축구계를 떠나지 않을 계획이다. “제 머릿속에 있는 것은 오직 축구뿐이고 가장 자신 있는 것 역시 축구예요. 선수생활을 하면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축구 실력이나 경기에 임하는 자세를 가지고는 욕 먹은 적이 없어요. 제가 추구하는 축구를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요.”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고려대 마크를 달고 경기에 나가면 학교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리고 선배에게 받은 사랑을 후배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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