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적이지 않아.” 이 말을 지난 2년 동안 끊임없이 들었음을 고백한다. 기사에서 학생들의 주장을 크게 다뤘다는 이유로, 관계자의 ‘적절한’ 해명을 싣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는 학교 관계자부터 동료 기자까지, 말하는 이는 달랐지만 따라오는 말은 언제나 비슷했다. “중립성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잖아. 삼류가 되면 안 되지.”

저널리즘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마도, 계속 모를 것이다. 미국의 대학에서 미디어학을 연구하고 고국의 교단에 선 이들도 잘 모르겠다는 그 이론을, 일개 미디어학 이중전공생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만 갈등이 발생할 때, 그리고 그것을 보도할 때, 기자는 양측의 입장을 균형 있게 서술해 독자에게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기본만은 외우고 있었다. 그래야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지 않는다고 했다.

훌륭한 감시견이되 한 사람만 물어서는 안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원칙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은 흐릿하지만, ‘기본도 없는 기자’라는 꼬리표를 달기 싫은 욕심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저 알겠다고 했다. “다음에는 꼭 유의해 앞으로는 균형 잡힌 기사를 쓰겠다”는, 모범 답안까지 완벽하게 해냈음은 물론이다.

의인 흉내를 내며 활개 치는 뜨내기에겐 기자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다. 예술적인 변명을 늘어놓는 책임자에게 웃으며 고마움을 전하고, 그 말을 오롯이 기사에 넣는 걸 언제나 낯설어했던 내게 저널리즘의 아름다움은 과분했던 셈이다.

현장에서 온갖 멸시를 버텨내는 사람들 앞에서 기자라는 이름의 초라함을 느끼고, 때로는 그들과 함께 분개하기도 했던 기자가 있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본래 소중한 의견을 내는 이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니까. 그들을 직접 찾아가서 ‘전체적인 과정을 잘 모른 채 투정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건네면서, 아무리 불쾌해하더라도 그들의 고견을 어떻게든 받아 적어야 한다. 말하지 않는다면? 엄정한 중립성의 원칙에 따라, 안타깝지만 그 기사는 포기하거나, 내보내되 독자의 오해가 없도록 공정한 사실만을 전달해야 한다.

다행히도 이제 기자라는 명함을 버려야 할 때가 됐다. 이제 미디어학을 공부하는 학생의, 언론을 챙겨보는 평범한 독자의 이름으로 다시 현장을 찾아갈 생각이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편안한 마음으로 기사를 읽을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억하며, 엄정한 중립성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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