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류는 언제나 행복추구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인류의 불행은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로 생산, 확대되고 있다. 소수집단이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미국의 법철학자 누스바움이 갈파하였듯이 투사적 혐오 때문인데, 투사적 혐오란 아무런 실제적 근거도 없지만 원초적 대상에서 역겹다고 느껴지는 속성을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전가하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혐오에서 인류애로>에서 그 해결 방법을 예술에서 찾았다. 인류애의 정치는 상상력을 동원해 타인의 삶에서 인간성을 찾아내 감성적으로 참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혐오의 정치가 인류애의 정치로 거듭나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상상을 하게 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즉 혐오로 인한 편견과 싸워 행복을 찾는데 예술이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수집단 가운데 가장 차별이 심한 장애인의 행복도 예술을 통해 이루어낼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면 왜 장애인예술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우리 나라의 장애인예술은 그 용어 정리도 불분명하고 장애인예술을 뒷받침해주는 이론도 아직 정립되지 않은 터라 장애인예술정책은 미미한 상태이지만 장애인예술에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장애인예술의 발전 가능성이 높기에 장애인예술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가야 한다.

 

장애인예술의 실태

2012장애문화예술인실태조사(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하면 장애예술인의 82.18%가 발표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고, 2007장애문화예술인실태조사(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장애예술인의 96.5%가 예술활동에 대한 수입이 없다고 응답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애예술인은 창작활동을 통해 소득을 창출하지 못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애예술인은 예술인의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예술인복지법으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고 장애인의 기본법인 장애인복지법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복지법에는 장애인의 문화활동 참여 권리(제4조)만 규정하고 있을 뿐, 예술활동 지원이나 장애예술인의 복지 증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렇듯 장애예술인은 법률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 나라 장애예술인의 실태이다.

장애인예술정책 부재로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이 불안정한 것도 문제이지만  장애예술인을 전문예술인으로 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장애인예술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다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다. 게다가 장애인예술의 차별은 Riddell와 Watson이 지적하였듯이 예술 체제에서 장애인을 배제하고 있어서 장애예술인은 주류 예술에서 벗어나 있다.

이렇듯 장애인예술이 열악한 상태이지만 2013년 출범한 박근혜정부는 4대 국정기조의 하나로 문화융성을 선포하여 장애인문화예술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2013년 초 장애인문화예술 업무가 체육국에서 예술국으로 이관이 되어 장애인예술을 일반예술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함께 하게 되었고,  2015년 11월 13일 서울 동숭동에 있는 구(舊)예총회관이 장애인문화예술센터(건물명 이음센터)로 새롭게 개관되어 장애인예술의 창작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장애예술인을 위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수행하는 장애인문화예술향수지원사업에서 장애예술인은 전체 지원금의 9% 정도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 장애인예술의 주체인 장애예술인의 지원이 미미하여 정부 지원에 대한 장애예술인 당사자들의 체감도를 낮다.
장애예술인은 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창작 활동을 통해 경제적인 자립을 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한다. 그 절실한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장애예술인에 대한 지원 제도가 필요하다.  

장애예술인은 예술활동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창작지원금제도’를 원한다. 창작을 해야 작품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기에 생활의 안정을 통해 창작의욕을 고취시켜 줘야 한다.

장애예술인에게 발표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방송, 영화, 출판, 전시회, 공연 등 모든 문화예술활동에 장애예술인의 참여를 일정 비율 의무화하는 ‘장애인예술 공공쿼터제도’가 실시되어야 한다.

또한 장애예술인은 취업이 어려워 새로운 고용 형태가 요구되는데  사업주가 장애예술인을 고용하여 사업체 업무 대신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그것을  장애인고용으로 간주하는 ‘장애예술인 후원고용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끝으로 문화예술의 순수한 사회공헌과 상업예술로서의 경제적 독립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적 공연’으로 장애인예술을 공공예술로 확대시켜야 장애예술인들의 역할이 확대될 수 있다.

 

앞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장애예술인 서더랜드(Sutherland)가  ‘장애인예술은 장애인의 소일거리를 위한 취미가 아니다. 그리고 치료도 아니다. 장애인예술은 그냥 예술이다’라고 하였듯이 장애인예술이 예술이란 인식이 필요하다.

장애예술인을 그냥 예술인으로 봐주고, 장애인예술을 그냥 예술로 봐주면 된다. 복지는 서비스 대상자에게 재화를 제공하면 되지만 예술은 관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장애인예술에 대한 편견없는 인식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예술의 소비자가 되어주면 장애예술인은 왕성한 창작으로 멋진 예술을 창조해낼 수 있다.

장애인예술이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우리 나라 장애인문학을 해외에서 관심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나라 장애인문학을 대표하는 <솟대문학>이 1991년 창간하여 2015년 100호를 기록하였는데 <솟대문학>  전권이 세계적인 명문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가운데 장애인은 있지만 솟대문학처럼 장애인문학이란 정확한 정체성을 갖고 체계적으로 장애인문학을 발전시킨 것은 한국의 장애인문학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흥미롭고, 장애인문학은 독특한 경험문학이기 때문에 연구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먼 훗날 <솟대문학>은 전세계적으로 장애인문학의 대명사가 될 것이다.

장애인문학의 가치가 잘 드러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손병걸직접 보지 않으면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 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시를 한 연 한 연 읽어내려가면서 중도에 실명을 한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 적응하며 눈 뜬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인 손병걸이 20대 후반에 시각장애를 갖게 된 후 모든 것을 잃고 어둠 속에 갇혀 좌절의 나날을 보내면서 시인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것을 시인은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라고 표현하였다.  시인은 두 눈을 잃은 것이 아니라 열 개의 눈동자를 얻은 것이다. 이 시 한편으로 장애인문학은 충분히 설명이 된다. 문학뿐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등 모든 장르에서 장애인예술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 장애인예술은 예술이 주는 감동과 작가가 주는 감동으로 2배의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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