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지 어느새 5년이 되었다고 고대신문으로부터 회고하는 글을 쓰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그 밝은 모습과 호탕한 웃음을 마치 어제 뵙고 들은 것 같은데 못 뵈온 지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선생님이 일본제국주의의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해서 광복군이 되어 싸웠던 이야기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고, 선생님의 제자로서 그리고 같은 학과 교원으로 30여년을 함께 생활하면서 듣고 겪었던 일들을 회고하면서 다시 한 번 그리운 선생님을 추모할까 합니다. 먼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박정희군사쿠데타정권 초기에 선생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부터 하려합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어느 날 만나자기에 만나는 일조차 거절할 수 없어서 갔더니 통일부장관 자리를 맡으라고 했다지요. 일본제국주의의 괴뢰만주국 장교출신으로서 가질 법한 친일약점을 감추기 위해 광복군출신을 각료로 두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군사독재정권 초기의 서슬이 퍼럴 때라 거절하기 어려웠는데도 깨끗이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거절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를 때는 구차한 이유 같은 것을 말하지 말고 상대를 똑 바로 보면서 한마디로 못 한다하면 된다고.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해서 광복군이 된 내가 아무려면 일본제국주의의 괴뢰군장교출신 밑에서 무얼 하겠는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노라 하는 뜻이 저절로 상대에게 전해진다는 거였습니다. 일본군을 탈출할 때 이미 목숨을 한번 버려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박정희정부의 통일부장관 제의와 노태우정부의 국무총리 제의를 모두 거절한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총장자리는 두말없이 맡으셨습니다. 그러고는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으로 해직된 교수들의 복직이 가능하게 되자 어느 대학보다도 한 학기 앞서서 복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곧 군사독재정부와의 마찰로 인해 총장자리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했습니다. 정부의 총장직 사퇴압력이 심하던 어느 날의 일로 기억됩니다. 총장실로 찾아가서 “선생님 일제시기의 학병탈출은 실패하면 곧 죽는 건데도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한 것이 광복군으로 더 영광되게 사는 길이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경우는 총장을 그만 두는 것이 곧 영광되게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씀드렸고, 내 건의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선생님은 곧 총장자리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총장직 사퇴를 하지 말라는 학생데모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그 많은 대학에서 총장사퇴를 요구하는 학생데모는 많이 일어났어도 정부의 강압을 이기고 총장자리를 사퇴하지 말라는 학생데모는 모르긴 해도 군사독재정부의 압력으로 총장자리를 내놓게 된 김준엽 고려대총장의 경우가 유일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정의로운 죽음이 곧 영광된 삶이 된다는 사실을 역사학전공자여서 조금은 더 절실하게 알게 된다고 하면 너무 ‘제 논에 물 대기’가 될까요.

잡지 <사상계>를 운영하고 정치일선에도 나섰던 장준하 선생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김준엽 선생님과는 일제 학병탈출 후 광복군에서 함께 근무한 평생의 동지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해서 광복군이 되었는데 일본제국주의의 괴뢰만주국 장교출신이 민주적으로 성립된 정부를 하루 밤에 뒤엎어서 정권을 잡고는 온갖 독재를 다하니 정말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장 선생은 박정희정권에 강하게 저항하다가 쫓기는 몸이 되었고 폭압적 독재정권의 감시가 너무 엄해서 마지막에는 숨을 곳이 없게 되자 결국 김준엽 선생님을 찾아왔고 김 선생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당연히 자택에 숨겨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 선생님에게서 직접 들었는데, 장 선생은 그후 결국 비명에 가시고 말았지요.

김준엽 선생님은 대단한 애주가였고 또 애연가였습니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나의 해직교수생활 4년간 선생님의 ‘술 은혜’ 참 많이 입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의 90세 기념모임을 가졌고 그때 뵈온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때 “지금도 애연 애주가 여전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담배는 끊었고 술은 아직은 조금한다”하신 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선생님이 강조하신 “역사학전공자가 세상에 대해 져야할 의무감과 가져야할 프라이드”가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부디 편히 쉬십시오. 명복을 빌고 또 빕니다.

강만길 문과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강만길 문과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강만길 문과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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