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 폰트는 언제 등장했을까? 서체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바로 활자다. 활자도 서체처럼 종류마다 다른 용도와 개성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활자를 보존하고 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활자의 나라, 조선’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 기획전을 준비한 국립중앙박물관 이재정 학예연구관을 만나 조선시대의 ‘서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활자의 나라, 조선" 기획전이 9월 1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된다. 사진 | 심동일 기자 shen@

- 조선시대 활자 개발은 얼마나 활발했나
“현재 남아있는 활자는 82만여 자다. 한글 활자는 금속 활자 2종, 목활자 3종 총 5종이 남아있다. 중국은 한 때 25만여 자를 만들기도 했는데, 전해져 오는 것이 없다. 일본도 활자를 많이 만들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때 만들어진 3만여 자가 남아있을 뿐이다.”

- 그 당시에도 서체, 폰트의 개념이 있었나
“있었다고 생각한다. 활자로 만들어내려고 했던 책의 성격에 따라 어떤 글씨체를 가진 활자를 쓸지에 고민이 있었다. 여러 글씨체 중 책의 내용에 맞는 글씨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특히 정조가 그랬다. 정조는 크기와 글씨체가 다른 여러 활자를 만들었는데 책을 만들 때 적절한 활자를 골라 사용했다.”

-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활자가 있나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갑인자다. 활자 주조가 가장 활발할 때 중 하나가 세종 시절이다. 갑인자 글자체를 보면 기본적으로 중국의 판본에서 대부분 따왔다. 중국 판본에 없는 글자는 세종이 직접 썼다. 이 갑인자를 조선시대 내내 사용했다. 정조 때까지 총 6번 녹이고 다시 만들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됐다. 한일병합 직후에도 갑인자가 사용됐다.”

- 하나의 활자가 시대를 어떻게 상징하나
“시대를 대표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표상의 의미는 있다고 본다. 역사서에도 기록돼있듯 활자는 왕권을 상징했다. 세조와 그의 동생 안평대군의 일화가 그 예시다. 안평대군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반대했다. (안평대군은 1453년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안평대군의 글씨체로 만든 ‘경오자’라는 활자가 있는데,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 활자를 다 녹여버렸다. 활자 주조가 가장 활발했던 때는 조선 전기에는 세종, 후기에는 정조 때다. 활자라는 것은 국왕들이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권위의 상징이기에 문화적인 성쇠와 활자의 성쇠는 그 결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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