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열하던 불볕더위는 위세를 한풀 접었다. 소란스럽던 매미울음은 잠잠해지고, 그 자리에 귀뚜라미 소리가 산산히 스며들었다. 바쁜 일과를 보낸 후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개강을 맞은 학교에서 떠나, 서울을 한량없이 걸어보자. 서촌, 장진우 거리, 익선동은 서울 속에서 여유롭게 시간과 섭슬릴 수 있는 곳이다. 이 길들을 직접 걸어보고 렌즈를 통해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왔다.

 

 

서촌, 걸음이 머문다 - 김주성 기자 peter@

▲ 1. 윤동주 문학관 제 3 전시실로 향하는 통로
▲ 2. 제 2 전시실에서 올려다 본 하늘의 풍경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서촌이라 칭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복궁 서쪽의 이 오래된 마을이 데이트 코스로서 정평이 난지도 이미 오래다. 과거의 시간을 간직해온 한옥과 골목길의 예스러운 모습은 방문객을 매료시킨다. 임대료가 비싼 북촌이나 홍대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든, 전도유망한 예술가들의 감각적인 공방과 갤러리는 서촌의 골목길을 더욱 정겹고도 새롭게 만든다.

  안암전철역 정류장에서 1111번이나 273번 버스를 타고 10분, 성북구청에서 272번으로 환승하고 20분을 달리면 사직동 주민센터 앞에 도착한다. 버스 하차와 동시에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로부터 풍기는 맛있는 냄새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조선왕조 500년을 버텨온 도읍, 팔도의 문물이 교차하며 문화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교류만큼 다채로운 음식문화 역시 일찍이 발달했다. 구중궁궐 깊숙이 임금님께 진상됐던 것부터, 잠시 고된 발을 쉬어가는 보부상의 입맛을 충족하는 것까지, 오래된 동네의 정서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음식점들이 골목골목 자리하고 있다.

  효자로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걷다보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건물들이 배경으로 흐른다. 대다수가 옛 건물의 얼개를 바탕으로 부분적인 재건축을 행한 형태다. 그래서인지 이웃한 경복궁의 담장과 조화를 이루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에 자리한 ‘아름지기재단’ 사옥은 지정문화유산 보존운동의 설립이념에 걸맞은 전통적이면서도 세련된 현대한옥이다. 전통 한옥의 개방감을 살린 2층은 아름다운 풍광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다. 한옥 특유의 조화로움은 아름지기재단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전통에서 현대적인 해석을 끌어내는 지역주의 건축의 좋은 예다.

 

▲ 3. 윤동주 시인이 산책하며 시상을 다듬었던 인왕산 자락에 '시인의 언덕'이 있다.
▲ 4. 1988년부터 서촌에 자리한 옥인오락실. 2011년 잠시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서촌 주민들의 모금으로 복원되었다. 80~90년대 옛날 오락기들이 손님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5. 아날로그 감성을 듬뿍 담은 디자인 소품을 팔아 서촌의 명물이 된 '미술관옆작업실'

   효자로 끝 삼거리에서 청와대 옆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윤동주문학관이 등장한다. 청년 윤동주에게 서촌은 특별한 장소다. 1941년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던 그는 매일 아침 이 골목길을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렸다. 그의 대표작 ‘별헤는 밤’, ‘자화상’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윤동주 문학관은 윤동주의 시적자아를 공간적으로 잘 표현해 내며 서울시 건축대상을 수상한 건축물이다. 물탱크가 있던 공간을 개축한 제2 전시실은 개방된 천장을 향해 우뚝 솟아오른 벽으로 사방을 둘렀다.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을 연상케 했다. 길을 따라 제3 전시실의 어둡고 습한 공간으로 들어가자 벽을 따라 흐르는 한줄기 빛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시를 향한 순수를 열망했던 청년의 마음을 느끼게 했다.

  문학관을 나와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인왕산 기슭을 따라 70~80년대 쯤 지어진 단층주택, 연립, 빌라들이 보인다. 이 오래된 주택가들에서 최근 데이트 코스로 급부상하고 있는 옥인길이 시작된다. ‘가게 오픈 시간 : 아침 언제쯤’, ‘Life is short! Time to play’ 같은 표어가 보였다. 현재를 즐기며 여유를 누리자고 외치는 이색적인 가게들이 옥인길의 분위기를 명랑하게 덧칠한다. 이러한 작은 외침들이 경쟁사회에 지친 수많은 청춘들을 이 외진 동네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아닐까?

 

▲ 6. 사직동주민센터 정류장 뒤 세종마음 음식문화거리 밤풍경.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는 젊은이들과 오랜 시간 그곳에 자리했던 노인들이 서로 이웃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서촌, 낮고 고즈넉한 한옥들 가운데 발랄한 걸음걸음 여유롭게 붙잡는 서촌길, 바쁘게 돌아가는 대도시 서울 한복판에 이런 마을이 존재한다.

 

 

장진우거리, 처음 느껴보는 익숙함 - 심동일 기자 shen@

  요즘 뜨는 거리를 뽑자면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빼놓을 수 없다. 6호선 녹사평역 2번 출구에서 녹사평대로를 건너 회나무로로 접어들면, 여러 나라 언어로 적힌 “안녕하세요”가 보인다. 거기가 경리단길 입구다. 경리단길에 왔으면 북쪽에 위치한 작은 골목길도 놓칠 수 없다. 회나무로13가길, 우리는 ‘장진우 거리’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 7. 동네 한 가운데에 위치한 영국 가정식 식당-‘블루밍 런던’. 핫한 가게와 동네가 어울리면서 공존하고 있다.
▲ 8. 한적한 거리 풍경, 장진우 거리의 일상 모습이다.

 

  경리단길이 이국적이고 화려한 분위기라면 장진우 거리는 이국적이면서도 캐주얼하다. 7년 전 프리랜서 장진우 씨가 지인들과 요리를 해먹던 작은 작업실이 ‘장진우 식당’으로 입소문이 돌면서 이 거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평범한 동네인 듯해도 트렌디한 인테리어로 꾸민 레스토랑, 술집, 카페 등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눈길을 끈다. 그러면서도 동네와 조화를 이뤄 장진우 거리만의 분위기를 이루었다. 어떤 가게는 간판조차 없어 한눈을 팔다가는 금방 놓치기 쉬울 정도다. 가게가 아닌 집과 같은 느낌이 오히려 거리에 정취를 더해준다.

 

▲ 9. 오전 11시, 카페와 바 ‘칼로&디에고’는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 10.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이 행인들의 눈길은 끈다.

 

  장진우 거리의 많은 가게는 유럽의 술집처럼 해질 무렵에야 영업을 시작해 열시 반이면 하나둘씩 문을 닫는다. 손님들은 내일의 일상을 그르칠 우려 없이 가볍게 저녁을 충분히 즐긴다. 이런 이유로 언제나 문전성시인 경리단길과 달리 조용하고 아늑하다. 장진우 거리를 자주 찾는다는 서새미(여·24) 씨는 “경리단길은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여기는 한적하고 볼거리도 많아서 분위기가 좋다”고 한다.

  개성을 살리면서도 조화로움을 유지해가는 장진우 거리. 이들은 지금도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다. 유명한 맛집을 찾으러 북적북적한 공간에 치이는 것보다 장진우 거리를 한가롭게 걸어보자.

 

 

 

익선동길, 서울의 낡은 풍경화 - 이명오 기자 myeong5@

  “내가 처음에 이 건축계에 착수한 동기는, 우리 조선의 가옥제도가 너무나 불위생적이오, 불경제적임을 발견할 때부터입니다.”

  ‘조선 최초의 부동산개발업자’인 정세권은 조선의 얼을 지키고 열악한 주택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힘썼다. 일옥(日屋)과 문화주택(서양식 주택)이 경성(京城)에 북새를 놓는 와중에도 정세권은 한옥을 고집했다. 1929년, 정세권은 종로 익선동 33번지에 첫 삽을 떴다. 이어 익선동 166번지, 33-16번지, 19번지에도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한옥마을 익선동은 이렇게 탄생했다.

 

▲ 11. 5명의 노인이 슈퍼마켓 그늘 밑에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익선동의 주객들은 폭소와 시원한 맥주로 텁텁한 더위를 잡아낸다.
▲ 12. 화려한 그림이 소품가게의 벽에 수를 놓고 있다. 멀리서 낙원오피스텔이 골목길을 굽어보고 있다.

 

  지하철 종로 3가역 5번 출구로 나와 바로 길을 건너면 익선동으로 진입하는 골목이 나온다. 다닥다닥한 집 사이로 난 골목길은 두 사람이 지나가기에 딱 맞다. 골목에 들어서면 시곗바늘은 ‘경성’으로 돌아간다. 담벼락을 버티고 든 낡은 벽돌과 녹슨 창살, 흠집이 난 나무문이 옛 서울의 향기를 풍긴다. 종종 작금(昨今)의 냄새를 내는 가게가 있어도, 익선동의 시곗바늘을 앞지르지 않는다. 1970년대의 3대 요정이었던 ‘오진암’의 자리에 앰배서더 호텔이 들어서 현대의 마수를 뻗치고 있지만, 시간을 다그치지는 못한다.

 

▲ 13. 오후 7시 25분, 익선동 골목길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가게의 불빛은 맞은편 담벼락에 아롱진다.
▲ 14. 풀이 덕지덕지 붙은 전신주는 팔순이 된 늙은 집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익선동 골목길은 메고 있는 시간의 짐을 풀어헤치기 좋은 곳이다. 익선동의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노인들은 대낮에 슈퍼마켓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씹으며 맥주잔을 기울인다. 골목길을 막아서도 앞 사람을 재촉하는 법이 없다. 정처 없이 길을 걷다 목이 타서 ‘거북이슈퍼’로 들어갔다. 병맥주와 쥐포를 시켰는데, 쥐포는 맥주를 다 마셔갈 때쯤 상에 차려졌다. 다른 손님의 상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안주가 늦게 나온다고 지청구를 하는 손님은 없었다.

 

▲ 15. 노인이 끓는 태양을 피해 그늘에서 쉬고 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자리를 옮기는 모습이 다소 침전해보였다.

 

  젊은 사장이 연탄불에 구워 내오는 쥐포는 냄새만으로 회를 동하게 한다. 쥐포는 섬뻑 씹어 삼키기 어려웠다. 급하게 삼키려 들면 목을 찔렀고, 강하게 씹으려 들면 턱을 짓눌렀다. 거북이슈퍼의 손님들은 거북이보다 앞서 나가지 못했다. 식어서 딱딱해진 쥐포를 입에 물고 가게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덮인 뒤였다. 골목길 가게들의 불빛은 아득해서 맞은편 담을 넘지 못하고 물크러졌다. 전신주에 매달린 전구가 밝히고 있는 골목길을 따라 나가면 시곗바늘은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 익선동을 나와 종로에서 버스를 탔다. 차창 밖으로 대로를 질주하는 차들을 보며 박차를 가한 시간에 멀미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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